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잎새 Oct 09. 2024

27장. 도윤의 애정공세

 청명한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그 푸른색과 대비를 이루어 열매의 붉은색은 더욱 선연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색보다 더 고운 빛을 자아내는 서연의 입술……. 도윤의 시선이 한동안 그 분홍빛 입술에 머물렀다. 도윤은 서연의 눈빛을 보고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좀 전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지를 깨달았다. 자꾸만 그 이상의 것이 욕심이 나는 것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서연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연에게서 풍겨오는 찔레꽃 향기가 평소보다 훨씬 더 짙게 느껴졌다. 도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달콤한 향에 이끌려 천천히 서연의 얼굴로 다가가고 있었다.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입술이 막 서연에게 닿으려는 찰나, 자기 들려오는 호방한 목소리에 도윤이 멈칫거렸다. 서연은 어느 순간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도윤의 모습에 깜짝 놀라 화등잔만큼 눈이 커다래졌다. 

 "열매는 벌써 다 딴 겐가? 나도 도우려고 서둘러 왔건만 언제 이 많은 걸, 다……?"

 급한 걸음으로 뒤뜰로 들어서던 휘는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곤 하던 말을 흐렸다.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뛰어 나가는 서연과 못마땅한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는 도윤의 모습을 보니 방금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큼큼, 내가 눈치도 없이 너무 일찍 온 겐가?"

 "아니라고 부인하진 않겠네."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도윤의 양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짜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보군……. 지난번 축하연 날, 둘만 있게 해 준 게 효과가 있었나?'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 어찌 되었건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가 그저 반갑기만 했다. 아쉬운 눈빛으로 서연이 사라진 자리를 좇고 있는 벗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저리도 좋은 것일까……? 아직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감정이 부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순간, 휘의 머릿속에 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휘는 혜인과의 일을 도윤에게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 말문을 뗐다.

 "혜인 낭자가 예판 대감에게 따로 연모하는 사내가 있어 자네와 혼인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더군. 그리고, 그 상대가 바로 나라고 말을 했다지 뭔가?"

 "뭐? 그게 정말인가? 그러잖아도 아버지께 말씀은 들었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상대가 자네가 된 것인가?"

 "예판 대감이 워낙에 딸을 귀애하는 지라 혼담을 무른다 해도 쉽게 수락하시리라 여긴 게지. 하도 강경하게 나오시니, 낭자도 당혹하여 불쑥 그리 말해버렸나 보더군."

 "낭자에게 큰 폐를 끼쳤군. 내가 예판 대감을 직접 찾아뵙고, 혼담이 그리 된 것은 모두 내 탓이라 말씀드려야겠네."

 "지금 자네가 나서면 일이 더 복잡해질 뿐이네. 그러다 다시 혼담이 진행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래도 나 때문에 낭자가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네."

 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도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했다.

 "혜인 낭자의 일은 내게 맡기게. 어쨌거나 낭자가 연모하는 상대로 나를 지목한 이상, 이제는 나와도 상관있는 일이 되어 버렸네."

 "생각해 둔 좋은 수라도 있는 겐가?"

 "우선 대감을 찾아뵙고, 낭자를 먼저 연모한 것은 나라고 말씀드릴 생각이네. 지금은 자네와의 혼담이 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세간의 이목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혼담을 넣겠다 하면 대감도 수긍하실 것이네."

 "그러다 진짜로 혼사가 이루어지기라도 하면 어쩔 텐가?"

 "일단 대감의 화부터 진정시키고 난 뒤, 혜인 낭자와 뒷일을 다시 상의해 보기로 했네. 뭐, 어떻게든 방법이 있지 않겠나?"

 예판 대감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휘가 나서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차하면 진짜로 혼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거늘…….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도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여 휘가 혜인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휘가 아직 혼인에 뜻이 없는 연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도윤은 벗에게 찾아온 듯한 사랑이 반갑기만 했다.

 만약 휘가 정말로 혜인을 마음에 담았다면, 이는 진심으로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혜인처럼 좋은 여인과 맺어진다면, 분명 제 벗에게도 큰 복이리라……. 도윤은 휘가 하루빨리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혜인과 맺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한편 별채에서는 서연이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있는 두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 오라버니가 뭘 하려 했던 거지……? 설마 내게 입을 맞추려 했던 건 아니겠지? 아니야,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제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던 도윤의 모습이 생각나 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냥 있어도 잘생긴 그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자니 진짜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서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가만있자……. 혜인 언니가 집에 오기로 한 날이 언제였더라……? 이번에 언니가 올 때, 서책을 가져다준다 하였지?'

 딴생각을 하며 이제 겨우 평정심을 되찾는가 싶었던 것도 잠시, 휘와 함께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도윤을 보자마자 심장이 다시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흠……. 우리 서연이가 뭐에 그리 놀랐길래, 이 오라비를 보고도 인사도 없이 그리 줄행랑을 친 게냐? 혹여 윤이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 아닙니다! 갑자기 육혈(六血)이 나오는 것 같아 뛰어나간 것입니다!"

 육혈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도윤이 서연에게 다가갔다.

 "육혈이라니 그게 사실이오? 어디 봅시다. 몸은 괜찮은 게요?"

 서연은 황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도윤과의 간격을 넓혔다.

 "제가 착각한 것입니다. 육혈이 아니었습니다. 전 괜찮으니 그, 그만 좀 다가오십시오."

 도윤은 육혈이 아니라는 서연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그만 다가오라는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 듯 서연에게 더욱 바짝 다가섰다. 그 탓에 서연의 붉어진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올 겨를이 없었다.

 "자자, 둘이 다정해 보이니 좋기는 하다만, 나머지는 나 없을 때 마저 하도록 하게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서연을 보다 못한 휘가 넌지시 도윤의 도포자락을 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겨우 도윤과 간격이 생긴 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도윤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아주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연이 저렇게까지 반응을 보일 줄은 저도 몰랐던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도윤은 앞으로도 서연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애정 공세를 펼치리라 마음먹었다.  

 어느덧 평소의 얼굴색을 되찾은 서연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휘의 모습에 영주댁이 가져다준 식혜를 건네주며, 자리를 권했다. 창창한 하늘이 좋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툇마루에 자리 잡고 앉은 세 사람은 혜인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휘로부터 사정을 전해 들은 서연은 처음엔 깜짝 놀라긴 하였으나, 어쩐지 연모하는 상대로 휘를 지목한 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저를 대하는 휘의 모습에서, 저리 다정한 이라면 곤경에 처한 자신도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휘가 이리 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오랜 시간 휘를 보아온 서연이기에, 휘의 이런 행동이 다만 다정한 성품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저는 저만을 아껴주는 이를 만나 백년해로하고 싶습니다.'

 서연은 혜인이 자신을 처음 찾아왔던 날,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휘라면 혜인이 꿈꾸는 좋은 낭군이 되어주지 않을까……? 뭇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고는 다니지만, 휘가 그 어느 누구와도 깊은 정을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서연이었다. 휘가 한 여인을 연모하게 된다면, 분명 그 여인만을 오롯이 마음에 담으리라……. 휘의 준수한 얼굴과 혜인의 고운 얼굴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생각만으로도 근사해 어쩐지 제가 더 설레는 것 같았다.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두 사람이 인연을 맺는 다면, 그보다 기쁜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따사로운 가을볕 아래, 언제 들어온 것인지 빨간 고추잠자리 두 마리가 사이좋게 마당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곡이 영글고, 모든 것이 풍성해지는 계절 탓일까……? 서연의 마음에도 모처럼 여유란 것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전 26화 26장. 적극적으로 다가서기 시작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