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휴일(旬休日) 아침, 날이 밝자마자 휘는 의관을 제대로 갖춰 입고 예조 판서 박명훈 대감의 집을 찾았다. 진즉에 대감을 찾아뵙는다는 것이, 근자에 부쩍 바빠진 업무 탓에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혼담이 깨지고 난 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예판 대감이 혜인의 바깥출입을 막고 있단 소릴 듣고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평소 즐겨 입는 화려한 복색 대신 짙은 남색의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입으니 어딘가 점잖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가지런히 늘어뜨린 녹색 입영 사이로 오늘따라 휘의 준수한 용모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급하게 오느라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솟을대문 앞에 서서 목청을 높이니, 청지기가 얼른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것인지 청지기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휘를 안내했다. 평소 워낙에 호탕하고 대범한 성미를 지닌 휘였지만, 예판 대감이 있을 사랑채가 가까워지자 슬슬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은 대감이 애지중지하는 둘째 딸의 혼사를 망친 장본인으로서, 그 딸을 연모한다 말하러 가는 길이 아니던가?
'가만있자… 대감의 성정이 어떠하였더라……?'
휘는 조정에서 보아 온 예판 대감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고 매사에 너그러우며, 능구렁이 같은 좌상의 도발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는 점잖은 분이었다. 꾸짖기야 하시겠지만 그래도 대감의 성정을 생각해 볼 때, 그리 심하지는 않으리라… 여긴 건 모두 휘의 착각이었다.
"네 이놈! 남의 집 귀한 여식의 혼사를 망쳐 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드나드는 게냐?"
'이, 이놈?'
어느 정도 꾸지람을 들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조정의 녹을 먹고 있는 어엿한 정육품의 관료이거늘, 다짜고짜 놈이라니……. 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은 뒤,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명훈에게 다가갔다.
"고정하십시오, 대감. 이리 흥분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제가 다 잘못하였으니, 노여움을 푸시고 우선 제 말부터 좀 들어보십시오."
명훈은 부러 큰소리를 냈건만, 제 불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휘의 모습에 내심 마음이 흡족했다.
'암, 사내라면 배포가 커야지.'
기실 이제나저제나 휘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명훈이었다. 비록 이판 대감과 사돈을 맺지 못하게 된 건 아쉬웠으나, 아직 정식으로 혼약을 맺기 전이기도 했고 이왕이면 딸아이가 좋아하는 상대와 연을 맺어줄 수 있다면 아비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조정 내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들 중에서도 이지평과 김정언은 가히 으뜸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휘의 아비인 도승지 대감과는 사적인 친분도 없는 데다, 김정언은 워낙에 여인들과 소문이 무성한지라 딱히 사윗감으로 눈여겨보지 않았거늘 딸아이와 이리 인연이 될 줄이야…….
명훈은 매의 눈으로 눈앞에 서 있는 휘를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잘 빚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얼굴에 훤칠한 기럭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이지평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용모였다. 명훈은 자꾸만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휘를 쏘아보았다.
"아깐 내가 하도 화가 나서 대뜸 놈소리부터 나왔네만, 솔직히 그런 말을 들어도 싸지 않은가? 다른 일도 아니고 인륜지대사를 그리 망쳐놓다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예, 대감. 몽둥이찜질부터 하시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십니까? 역시나 대감께선 아량이 넓으신 분이십니다."
'몽, 몽둥이찜질? 허, 이 녀석 봐라…….'
아무리 여식의 혼사를 망쳐 화가 났다고는 해도 도승지 대감의 아들에게 몽둥이찜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명훈은 오히려 자신을 떠보고 있는 듯한 휘의 능청에 기가 막혔다. 휘는 명훈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 틈을 타, 얼른 고개를 넙죽 조아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대감! 비록 혼담이 오간 것은 사실이나 아직 정식으로 혼약을 맺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낭자를 한 번 본 뒤로 도저히 낭자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이미 이지평과 혼담이 오가고 있는 것을 도성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이리 혼담을 망쳐 놓으면 어쩌겠다는 겐가? 게다가 자네가 딸아이를 연모한다는 그 말도 내 어찌 믿으란 말인가? 자네에게 어디 여인이 한둘인가? 여인들이 잘난 사내를 따르는 것을 흠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아비가 딸자식이 마음 고생하는 것을 좋아라 하겠는가?"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성격 탓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인들에게도 늘 다정했고, 그걸 오해한 여인들이 제멋대로 소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와전되어 수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워낙 자신에 관한 소문을 그냥 흘려듣는 휘인지라 굳이 변명을 하고 다니지도 않았더니, 어느 순간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어느 여인에게도 깊은 정을 준 적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많은 여인들과 친분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휘는 바람둥이가 아니라고 해명하기보다 정면 돌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휘가 진중한 눈빛으로 명훈을 바라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떼기 시작했다.
"오르내리는 그넷줄 따라 함께 오르내리는 건
고운 여인의 붉은 댕기만이 아니었네.
그넷줄 오를 때 내 심장 함께 뛰고,
그넷줄 내려올 때 내 가슴 함께 내려앉네.
그대 치마에 새겨진 자색 붓꽃인들
그대의 넘치는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으리?
푸른빛 녹음이 아무리 눈부신다 한들
그대의 맑디 맑은 눈빛보다 빛이 날까?
오르내리는 그넷줄 따라 함께 흔들리는 건
아무리 접어보려 해도 그칠 수가 없는 이 내 마음."
휘가 제 아비에게 혼쭐이 나고 있단 소리를 전해 듣고 급히 사랑채로 건너오던 혜인은 별안간 들려오는 시구(詩句)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이 진짜로 자신을 연모하기라도 하는 듯 절절한 마음을 시에 담아내고 있었다. 혜인의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낭자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당장이라도 허혼 하여 달라 청하고 싶으나, 아직은 지평 나리와의 혼담에 관한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대감께서는 저를 냉혹하게 평가해 주십시오. 대감의 허락이 떨어지는 날, 정식으로 청혼을 하겠습니다."
휘가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명훈은 점점 더 휘가 마음에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반대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 지경이었다.
"만약 내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면 어쩔 텐가?"
"한 번도 사내의 마음을 얻고자 애써본 적은 없습니다만… 한 번 해보지요. 반드시 대감께서 저를 원하시도록 만들겠습니다!"
자신만만한 휘의 눈빛을 바라보며 명훈은 이미 반 이상은 마음이 기울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휘의 말대로 이지평과의 혼담에 관한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딸아이의 혼사를 다시 거론하는 것보다 조용히 지내는 것이 나을 터였다. 명훈은 그사이 휘가 변심이라도 할까 봐 불안한 마음에, 당장 둘을 짝을 지어 줄 수 없는 것이 아쉽기까지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에 대한 자네 마음이 그리 깊다 하니, 일단은 내 자네를 지켜보기로 함세."
"감사합니다, 대감.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환한 웃음을 머금은 휘의 수려한 얼굴이 따사로운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혜인은 어쩐지 그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자신이 없어 조용히 돌아서서 다시 별채로 향했다. 제 방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휘가 읊던 시구가 그의 잘생긴 얼굴과 함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단옷날 제가 입었던 치마가 무엇이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역시나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귀신같은 사내였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그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게지……. 하지만 혜인은 그 수많은 여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인 좋아하는 사내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나중에 무슨 고생을 하려고… 암, 절대 안 될 일이지!'
혜인은 휘가 다만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 행동했을 뿐이라며, 자꾸만 휘에게로 향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