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잎새 Oct 11. 2024

29장. 고삐 풀린 혜인

 "서연아! 그동안 네게 오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단다. 이리 네 얼굴을 보니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혜인 언니! 저도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제 예판 대감의 화는 다 풀리신 겁니까?"

 휘의 방문으로 드디어 외출 금지령이 풀린 혜인은 제일 먼저 서연의 집을 찾아 회포를 풀었다. 집안에 갇혀 지내는 동안 혜인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서연이었던 것이다. 서연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혜인에게 있어서 서연은 가장 가까운 벗이자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벗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서연과 혜인은 두 손을 맞잡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마침 수정과를 들고 방에 들어서고 있던 영주댁이 그 모습을 보고선 흐뭇한 눈으로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씨에게 혜인 아씨처럼 좋은 벗이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도윤과 휘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또래의 여인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은 또 다른 것이었다. 혜인과 함께 있을 때의 서연은 재잘재잘 수다도 떨고 웃기도 많이 웃으며, 딱 그 나이 대의 밝고 사랑스러운 규수로 보여 영주댁을 기쁘게 했다. 집안이 몰락한 뒤로 다른 댁 규수들과는 일절 교류를 하지 않고 있던 제 아씨가, 이제라도 또래의 벗을 만나 저리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영주댁은 두 사람이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다과만 들여다 준 뒤,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휘 오라버니가 예판 대감을 찾아뵙길 잘한 것 같습니다. 언니가 이리 다시 저희 집에 오실 수 있는 것을 보면 대감과 얘기가 잘 되었나 봅니다."

 "하인들에게 듣자 하니,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하더구나. 아무 잘못도 없는 정언 나리께 그런 불호령을 듣게 하다니, 얼마나 송구스럽던지……."

 "휘 오라버니는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하시고 대감께 가셨을 겁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서연의 말에 혜인은 제 아비와 담판을 짓던 휘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장난기가 가득한 가벼운 사내라 여겼거늘 그날의 휘는 진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가 읊던 시는… 진짜 자신을 연모한다고 착각할 만큼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았다. 그때를 떠올리자니 다시금 가슴이 세차게 뛰어 올랐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기 위한 연기였을 뿐, 휘와 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혜인의 씁쓸한 표정을 읽은 서연은 혜인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현명한 혜인이라면 휘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휘가 진짜로 어떤 사내인지도 깨달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휘에 대한 소문을 일일이 해명하기보다는 혜인이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좋은 분이십니다……. 물론 언니도 이미 아시겠지만요……."

 어쩐지 서연에게 제 마음속의 번뇌를 들킬 것만 같아 혜인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밖에 나다니지 못하게 하시니 진짜 갑갑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단다. 오늘은 내 그간의 고생을 다 풀고 들어 갈 생각이란다, 후훗."

 혜인은 언제 고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서연에게 들고 온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얼떨결에 보따리를 받아 든 서연이 그것을 풀어보니, 그 안에는 사내의 복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혜인 언니. 갓과 도포는 왜 들고 다니시는 겁니까?"

 "운종가 사거리에 새로 생긴 주막이 하나 있는데, 그곳 주모의 음식 솜씨가 그렇게 훌륭하다는구나. 게다가 주모가 담근 막걸리 맛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힌 지, 마셔도 마셔도 취하는 줄도 모른다는구나."

 "설마… 지금 사내의 의관을 착용하고 그곳에 가보자는 말씀이십니까?"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물론 영주댁 음식 솜씨가 최고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어찌 집밥만 먹고살 수 있겠느냐? 가끔 다른 것도 좀 먹어주고 해야지. 진운이가 곁을 지킬 터이니 안심해도 된단다. 사실 나는 전에도 사내의 복식을 하고 주막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규방에 갇혀 먹는 음식 하고는 맛부터가 다르단다. 서연이 네게도 꼭 그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으니 우리 같이 나가 보자꾸나, 응?"

 "하지만……."

 서연은 생각지도 못한 혜인의 제안에 곤란한 표정으로 혜인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내의 복식을 하고 주막에 가보자니……. 망설이는 서연의 모습을 본 혜인이 더욱 적극적으로 서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서연아, 나는 정말로 너와 함께 꼭 주막에 가보고 싶단다. 나와 같이 가보지 않으련… 응?"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고, 잔뜩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선 자신을 바라보는 혜인의 모습이 어쩐지 휘와 꼭 닮아 보였다. 저런 얼굴로 부탁을 해오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한 하늘빛 도포와 진분홍빛 도포를 번갈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하늘빛 도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아! 그럼 나와 함께 가기로 한 거다?"

 서연의 승낙에 신이 난 혜인은 얼른 자신부터 의관을 착용한 뒤 재빨리 서연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혼자 주막에 가는 것보다 동무가 생기니 몇 배는 더 즐거운 것 같았다. 서연과 혜인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웃음이 나와 서로를 민도령, 형님이라 칭하며 장난을 쳐보기도 했다. 밖에서 혜인을 기다리고 있던 진운은 사내의 복식을 갖춰 입고 나오는 혜인의 모습을 보고는 골치가 아파왔다. 남장을 하고 주막에 가는 것이야 이전에도 혜인이 한 적이 있다지만, 지금은 대감마님의 화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게다가 이 집 아씨까지 같이 가다니… 하지만, 자신이 만류한 데도 아씨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유모, 혜인 언니랑 운종가 주막에서 국밥만 한 그릇 먹고 돌아올게. 금방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마."

 사내의 복색으로 집을 나서려는 서연의 모습에 영주댁은 기함할 듯이 놀랐지만, 오랜만에 보는 아씨의 생기 어린 얼굴을 보니 차마 말릴 수도 없었다. 영주댁은 신이 나서 대문을 나서는 두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 영주댁에게 진운이 다가와 휘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자신의 힘만으로 아씨를 말리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제 아씨도 정언 나리의 말이라면 귀담아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영주댁에게 그리 말을 한 것이었다. 영주댁은 서연과 혜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얼른 돌쇠를 찾아갔다.

 "자네, 지금 당장 사간원 관청에 좀 다녀와줘야겠네."

 영주댁이 자신을 찾는다는 청지기의 말에 얼른 대문 앞으로 나온 돌쇠는 느닷없는 영주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헌부도 아닌 사간원 관청에 다녀오라니……. 제 도련님이 아닌, 휘 도련님에게 볼 일이 있다는 뜻인데 무슨 연유인지가 궁금했다.

 "지금 서연 아씨와 혜인 아씨가 남장하고 운종가에 새로 생긴 주막에 가셨다네. 아무래도 휘 도련님께서 가보셔야 할 것 같네. 마침 퇴청할 시간이 되신 것 같은데… 자네가 수문장들과 면식이 있으니, 내 대신 가서 말씀 좀 전해주게."

 돌쇠는 영주댁의 말을 듣곤 깜짝 놀라 부리나케 사간원 관청을 향해 달려갔다. 관청 앞에 이르러 가쁜 숨을 내쉬며, 정언 나리에게 전할 것이 있으니 나리를 좀 불러 달라 청한 뒤 초조한 마음으로 휘를 기다렸다. 마침 퇴청 준비를 하고 있던 휘는 돌쇠가 자신을 찾아왔단 말에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관청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돌쇠야. 무슨 일이길래 그리 헐레벌떡 달려온 게냐?"

 "나리, 지금 운종가로 좀 가보셔야겠습니다. 예판 대감댁 아씨와 서연 아씨가 사내의 복식을 하고, 그곳 주막에 가셨다 합니다."

 "그게 정말이냐? 혜인 낭자와 서연이가 지금 운종가 주막에 있다고?"

 "예, 나리."

 남장을 하고 주막에 갈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서연까지 따라나섰다니……. 운종가에서도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난 주막이라, 호기심에 그곳에 가보고 싶은 것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사내들만 득실득실한 곳에 혜인과 서연이 있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휘는 곧장 사헌부 대장청으로 도윤을 찾아갔다.

 "일이 끝났으면 어서 빨리 운종가로 가보세. 그곳에 새로 생긴 주막에 지금 혜인 낭자와 서연이가 있다는군 그래."

 "뭐라고? 아니, 그게 사실인가?"

 서연이 혜인과 함께 이 시간에 주막에 갔다니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평소 서연의 성정으로 보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도윤과 휘는 다급한 마음으로 대장청을 빠져나와 운종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전 28화 28장. 휘와 예판 대감의 담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