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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14. 2024

30장. 운종가 주막

 운종가 사거리 안에서도 가장 목이 좋은 곳에 자리한 주막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벅적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주막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상에 놓인 음식들이 어찌나 맛깔스러워 보이는지 절로 군침이 돌 정도였다. 혜인과 서연은 행여나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싶어 부러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막 나온 음식들을 맛보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캬~~ 바로 이 맛이야. 사람들이 다들 맛있다고 칭찬 일색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어떤가, 민도령? 참으로 맛나지 않은가?"

 "예, 형님. 국밥의 국물이 구수하면서도 맛이 아주 깊습니다. 게다가 막걸리 맛도 순하고 부드러워 술을 못하는 제게도 딱입니다."

 아까 집에서 연습해 본 게 효과가 있었던지 서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형님 소리가 나왔다. 

 "민도령, 자네도 시경(詩經)을 좋아하는가?"

 "예, 저는 그중에서도 <소아(小雅)>편을 특히 좋아하여, 그 부분은 여러 번 읽었습니다."

 사실 혜인과 서연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둘 다 서책을 좋아하고, 서책을 읽는 수준 또한 상당히 높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혜인은 다른 규수들과 달리 수놓기나 바느질에 서툴고 서책만 좋아하는 자신이 늘 유별나다 생각했는데, 이리 같은 취미를 가진 서연이 있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랐다. 

 "나도 시경에서는 <소아(小雅)>편을 제일 좋아한다네." 

 서연과 좋아하는 시가 같자 더욱 흥이 오른 혜인이 먼저 소아편의 사모(四牡) 시를 읊기 시작했고, 서연이 자연스럽게 뒤를 받았다.

 "사모비비(四牡騑騑) 주도위지(周道倭遲)  

  기불회귀(豈不懷歸) 왕사미고(王事靡盬) 아심상비(我心傷悲)." 

 "사모비비(四牡騑騑) 탄탄락마(嘽嘽駱馬)

  기불회귀(豈不懷歸) 왕사미고(王事靡盬) 불황계처(不遑啟處)……." 

 고운 얼굴을 한 두 선비가 시를 읊조리자, 주막에 있던 사람들의 흥미 어린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만의 이야기에 빠져 주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혜인과 서연은 더욱 신이 나서 이번엔 벌목(伐木) 시를 읊기 시작했다. 

 "벌목정정(伐木丁丁) 조명앵앵(鳥鳴嚶嚶)

  출자유곡(出自幽谷) 천우교목(遷于喬木)"

 이번엔 서연이 먼저 시작하고, 혜인이 뒤를 이어받으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사내의 음성이 혜인 대신 시의 뒷구절을 읊조리는 게 아닌가?

 "앵기명의(嚶其鳴矣) 구기우성(求其友聲)

  상피조의(相彼鳥矣) 유구우성(猶求友聲)……."

 깜짝 놀란 서연과 혜인이 옆을 돌아보니, 훤칠한 용모를 한 젊은 선비 셋이 이쪽을 보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중 시를 읊은 선비가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도령들의 시 읊는 소리가 하도 낭랑하여 결례인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조 좌랑 김윤수라 하고, 저 친구들은 호조 좌랑 문수원과 이기훈이라고 합니다."

 낯선 사내들이긴 했으나 신분을 밝힌 데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있어 경계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진운도 사내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것뿐인데 굳이 막아서기도 뭣한 데다, 선비들의 신분도 확실한 터라 일단은 잠자코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희는 둘 다 아직 과거를 치르지 않아 관직이 없습니다. 저를 박도령, 이 친구를 민도령이라 부르시면 될 듯합니다."

 "아까 보니 도령들의 학식이 꽤나 깊어 보였는데, 어찌 아직 과거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이제 겨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일 뿐 과거를 보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윤수는 가까이서 본 두 도령의 얼굴이 앳되어 보여, 아직 나이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도령들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총기 어린 눈빛이며 절도 있는 언행이 예사롭지 않아 몹시도 마음이 끌리는 도령들이었다.

 "도령들과 좀 더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데, 괜찮으시면 저희들과 자리를 합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같이 시문(詩文)을 즐기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만……."

 갑작스러운 제안에 뭐라 답할지를 몰라 혜인과 서연이 망설이는 사이, 언제 왔는지 휘가 윤수의 앞을 막아서며 대신 답을 했다.

 "이 도령들은 지방에서 온 내 친척들이네. 집안 어른들이 기다리고 계시니 이만 데려가겠네."

 "아, 김정언 자네의 친척이었군그래. 지금 바로 돌아가봐야 하는 겐가? 이제 막 도령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려던 참인데, 아쉽군."

 가뜩이나 용모가 수려하고 인품도 좋기로 평판이 자자한 윤수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서연과 혜인을 바라보자, 휘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휘의 속도 모르고 호조의 좌랑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잠시 주막에 있다 간다고 어른들께서 그리 뭐라 하시겠는가?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도령들과 시문을 나눌 시간 정도는 좀 주게나."

 "문좌랑의 말이 맞네. 나도 도령들이 읊는 시를 더 듣고 싶은데,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에는 영 섭섭하네."

 비록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있어도 이들 모두 본능적으로 두 여인에게 끌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 친분도 있고 조정 내에서 뜻도 잘 맞는 이들이었건만, 오늘은 어쩐지 물리쳐야 할 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윤수가 살짝 몸을 틀어 휘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두 여인, 정확히는 서연에게 시선을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령들의 생각은 어떻소? 도령들만 좋다면 김정언은 내가 설득해 보리다."

 서연과 눈이 마주치자 윤수는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에 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윤수가 서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그의 앞을 막아서는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요즘 좌랑들이 많이 한가한가 보군. 출사도 하지 않은 어린 도령들과 시문을 나눌 여유도 있는 걸 보니."

 서연의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해보고 싶었던 윤수는 자신을 막아서는 서늘한 목소리의 주인이 사헌부 지평 이도윤임을 알아보고는 더 이상 서연에게 다가설 수가 없었다. 본디 같이 과거에 급제한 동기였으나, 이제는 정오품으로 승진해 품계가 더 높을뿐더러 도윤의 아비가 이조 판서였으니 이조의 관원인 윤수에게 도윤은 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세 좌랑들은 도윤까지 등장하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먼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도령들의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하는 미련이 남긴 했지만, 어차피 지방에 살고 있다 하니 급제하여 한양으로 오지 않는 한 다시 보기도 힘들 터였다. 윤수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으나, 두 벗이 양쪽에서 끌어대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어찌 이리 경솔하시오? 예판 대감께서 낭자가 이리 사내의 복식을 하고, 주막에 온 사실을 아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이곳에서 휘를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혜인은 며칠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더없이 반가웠다. 하지만 저를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나무라는 듯한 휘의 모습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버지는 상감마마의 능행길에 따라나서신 지라, 며칠간 집을 비우실 것입니다. 어머니께는 주막에 다녀오겠다 말씀드리고 허락도 구한 참입니다."

 "집안에 대감의 눈과 귀가 되어줄 다른 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소? 낭자가 이리 남장을 하고 주막에 와서 다른 사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 것을 알면, 이번에야말로 대감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게요. 당분간은 갑갑해도 대감의 눈밖에 벗어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소."

 그동안 집 안에만 갇혀 지내던 답답함을 풀고자 나왔을 뿐인데, 이리도 혼이 날 일인가……? 매사 다정하기만 하던 휘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속상함이 배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내들과 함께 있는 혜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던 휘는 혜인의 풀 죽은 얼굴을 보자, 제가 지나쳤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좀 더 부드럽게 말했어도 되었을 텐데…….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왜 그리 화부터 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리 의기소침해진 혜인을 보니 제 감정보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다음에 주막에 오고 싶으면 그땐 내게 말하시오. 내가 함께 하리다."

 휘의 누그러진 음성에 마음이 풀린 혜인이 순순히 그러겠다 답하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일순 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오르락내리락하는 제 감정이 당황스럽기만 한 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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