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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08. 2024

26장. 적극적으로 다가서기 시작하다

 "아씨, 그러다 손이라도 찔리시면 어쩌시려고요? 저 혼자 딸 터이니 제발 앉아서 편히 구경만 하시라니까요."

 "내가 매년 찔레열매 따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 그러느냐? 모르긴 해도 찔레나무에 관해서라면, 내가 돌쇠 너보다 잘 알게다."

 서연은 좀처럼 자신의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돌쇠를 안심시킨 뒤, 익숙한 손짓으로 다시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어머니와 해온 터라 누구보다도 능숙한 일이거늘, 어찌 매번 저리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만류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돌쇠가 이리 유별나게 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혹여라도 서연이 찔레나무 가시에 찔리기라도 했다간 제 도련님이 펄쩍 뛸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쇠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서연은 한순간도 손을 놀리지 않고 열매를 땄다.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듯 찔레나무에는 빨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다른 사대부가에서는 대부분 능소화를 가꾸는 것과 달리 서연의 집에는 늘 찔레나무가 가득했다. 산이 많은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가 찔레꽃을 유독 좋아하셨기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것들이었다.

 봄이면 새하얀 꽃이 만개했고, 가을이면 새빨간 열매가 정원을 뒤덮었다. 어렸을 때는 찔레꽃의 아름다움에 눈이 갔는데, 의술을 공부하고 나니 열매의 효능에 더욱 관심이 갔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찔레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새순부터 열매, 뿌리까지 어느 것 하나 쓰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잠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던 서연은 서둘러 다시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올해는 의원을 드나들며 의술을 배우는 통에 예년보다 열매 따는 시기가 많이 늦어졌던 것이다. 오늘 안에 마무리를 지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열매를 따느라 여념이 없던 서연은 어느 순간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하나가 함께 열매를 따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돌쇠려니 여겼는데, 바람을 타고 온 익숙한 묵향이 훅 코끝을 스쳤다.  

 '설마……?'

 서연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돌쇠라기에는 한참을 더 올려다봐야 하는 수려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돌쇠는 제 도련님의 등장에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마음 편히 영주댁을 도우러 앞마당으로 건너갔다.

 "올해도 열매가 아주 잘 익었구려. 어째 매년 더 많이 열리는 것 같지 않소?"

 "오늘은 어인 일로 이리 일찍 퇴청하셨습니까?"

 "대사헌께서 일찍 들어가라 명하셨소. 그동안 과중한 업무로 노고가 많았다며 한 번씩 이런 특혜도 있어야겠지 않냐고 하시더이다."

 이른 귀가로 기분이 좋은 듯 도윤의 얼굴에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 저리 웃고 있는 모습에 설레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을까……? 서연은 애써 그 잘생긴 얼굴을 못 본 척하며 열매를 따는 데만 열을 올렸다. 여기 올 시간이 있으면 집에 일찍 돌아가 좀 쉬기라도 하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어차피 제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속에 삼키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찔레열매가 열릴 때면 곧잘 서연과 함께 열매를 따곤 했던 도윤인지라, 열매를 따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 많던 열매가 거의 광주리에 담겨 가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열매 따기에만 집중하고 있던 도윤이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로 서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 지난번 산딸기주에 취해 내게 했던 말들은 기억나시오?"

 "예? 그게 무슨……."

 도윤의 느닷없는 물음에 열매를 따던 서연의 손놀림이 잠시 멈추었다. 그날 밤 산딸기주에 취해 잠이 들긴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잠깐 잠이 든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혹여 제가 술에 취해 주사라도 부린 것일까……? 그냥 한 번 해본 말인데 눈에 띄게 동요하는 서연의 모습에 어쩐지 장난기가 동하는 도윤이었다.

 "내 얼굴이 잘생겨서 좋다 하였소. 기억나시오?"

 "예? 제가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내가 총명하여 좋다고도 하였소. 무예가 뛰어난 것도 좋다 하였지."

 "그, 그럴리가……."

 분명 앞의 말은 서연이 한 것이 맞았다. 다만 뒤의 싫다는 말만 좋다로 바꾸었을 뿐...... 도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서연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서연은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지만, 어쩌면 정말로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취중진담이라 했던가……? 마음 속으로는 늘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서연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를 몰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처럼 굳어 있었다.

 "또 무어라 했는지 아시오?"

 어느덧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도윤이 서연의 귀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농이오. 사실 그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소, 하하하!"

 도윤은 너털웃음을 터트린 뒤 꽉 차 있는 광주리를 들고선 곳간으로 향했다.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던 서연은 도윤의 어이없는 말에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도윤이 이상했다. 항상 자신이 그어 놓은 경계 밖에서 예의를 차리기만 했지 한 번도 이리 가까이 다가왔던 적은 없었다. 서연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게 다가와 귀엣말을 속삭이던 도윤의 행동이 자꾸 떠올랐다. 게다가 하필 단옷날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까지 생각나는 바람에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휴……."

 서연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도윤이 의식되는 것인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이 답답했지만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런 서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윤은 그저 곳간에 열매가 담긴 광주리를 옮기느라 바빠 보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마지막 광주리까지 모두 곳간에 쌓아 둔 도윤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서연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내 미리 그대에게 일러둘 것이 있소. 이따가 예서 휘를 만나기로 하였으니 오늘은 일찍 돌아가라고 내칠 생각은 마시오. 휘를 보기 전까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소."

 언제는 제가 가란다고 간 적이나 있었던가……. 게다가 유모가 벌써 도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로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의 뜻을 내비쳤다.  

 "제가 무어라 하기라도 하였습니까? 휘 오라버니가 오시기로 하셨다니, 그리 하십시오."

 "그게 정말이오? 그럼 휘가 올 때까지 내 여기서 그대와 함께 있을 터이니, 그리 아시오."

 도윤은 자신을 내치지 않는 서연의 모습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가 또 다른 혼처를 구하겠다고 한 이상, 전처럼 서연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전까지는 서연을 배려해 성급하게 다가서는 것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뒤에서 지켜보지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마음이 제게로 오기를 주저하고 있다면, 제가 더욱 빠르게 다가가리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서연의 마음을 흔들어 볼 생각이었다.

 "올해는 열매의 양이 꽤 되는데, 이 많은 걸 다 어디다 쓸 생각이오?"

 도윤이 광주리 앞에서 열매의 상태를 세심히 살펴보고 있는 서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렸을 때는 그저 꽃이 예쁜 줄만 알았지, 찔레열매가 약재로 그리 유용한 줄은 몰랐습니다. 의원에 가져가면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의술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소?"

 "예,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몸이 아파 의원을 찾은 이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볼 때면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아버지께서 늘 서책을 통해 배운 것은 백성을 위해 쓰여야 한다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서연의 새까만 눈동자가 배움에 대한 열의로 반짝거렸다. 총기로 가득한 맑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에이, 오라버니. 서책은 그냥 읽고 외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며 그 안에 담긴 뜻을 깨우쳐야지. 참된 선비는 학문을 익힌 뒤, 그 배움을 백성을 위해 써야 하는 거야. 오라버니의 그 좋은 머리가 백성들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도윤은 문득 서책을 멀리하던 제게, 깨달음을 주었던 어린 시절의 서연을 떠올렸다. 지금 서연의 눈빛은 그때와 꼭 같은 눈빛이었다. 도윤은 잠시나마 그 행복했던 어린 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언제까지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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