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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5. 2024

34장. 자각해 버린 마음

 지난날을 회상하던 윤덕은 그때 억지로라도 승원을 붙들어 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올해로 승원의 나이, 스물 하나. 윤덕도 더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때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승원을 그냥 내버려 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승원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더군다나 제 대(代)에서 과거 급제자가 끊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관을 배출할 수 없다면 무관이라도 반드시 배출해 내야만 했다.

 "무과에 급제하면 너를 호적에 올려 정식으로 이 집안의 장자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윤덕 딴에는 큰 결심을 하고 던진 제안이었으나 승원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언제 이 집안의 호적에 오르고 싶다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고 싶었으면 애초에 이곳에서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대감께 제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자 함입니다. 다시는 의원에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승원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뜨려 하자 윤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마디를 던져 보았다.

 "의원에 함께 있다는 그 아이가… 전(前) 대제학 민성렬의 여식이 맞느냐?"

 예기치 못한 윤덕의 말이 승원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의원에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규수가 있다고 하길래, 내 사람을 시켜 좀 알아보았다."

 "그저 제게 의술을 배우고 있는 제자일 뿐입니다. 대감께서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닙니다."

 관심 가질 일이 아니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방을 나가려던 승원이 이리 다시 자리에 앉는 것만 봐도 충분히 관심을 갖고도 남을 일이었다. 윤덕은 그 여인이 승원을 붙잡을 수 있는 구실임을 확신했다.

 "무과에 급제하면 그 아이를 네 배필로 짝지어주마. 대제학이 그리 되지 않았다면, 이판 대감의 며느리가 되었을 아이 아니더냐? 미모며 인품이며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라고 들었다. 집안이 망했다고는 해도 한때 대제학에까지 오른 집안의 여식이니 나도 반대하지는 않으마."

 윤덕도 망해버린 집안과 혼사를 맺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으나, 승원이 무과를 치르기로 마음만 먹어준다면 혼사 정도는 뜻대로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윤덕의 말에 승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윤덕은 이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양반가의 여식인데 의원인 너와 인연을 맺으려 하겠느냐? 무과 급제자가 되어 관직을 얻으면 너도 당당히 그 아이 앞에 나설 수 있을 게다. 좀 더 시간을 줄 터이니,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거라."

 윤덕은 승원을 붙잡을 수 있는 약점을 알아냈다 생각하니 그동안 느껴왔던 초조함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말없이 돌아서는 승원을 그냥 지켜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까지 생겨났다.

 '죽은 민성렬의 여식이 어찌 승원이에게 와서 의술을 배우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내겐 그 아이가 좋은 패가 되겠구나.'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문을 나서는 승원을 보며 윤덕이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았다.

 "좋구나, 좋아! 하하하!"   

 방 안에선 한참 동안 윤덕의 기꺼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하던 것을 얻게 된 자의 시원스러운 웃음이었다.

 


 **



 윤덕의 집을 나선 승원은 올 때의 마음과는 달리 의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서연과의 혼례를 조건으로 무과에 응시하라는 윤덕의 말에, 어째서 가만히 있었던 것인지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한 번도 서연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서연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그녀에게 의술을 가르치는 시간이 즐거웠다. 눈앞에 서연이 있으면 그녀를 챙기긴 했으나, 타고난 성품이 사람에게 다정한지라 자신의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도윤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 것도 다만 아끼는 제자를 독점하고픈 욕심이라고만 여겼다. 설마 그 안에 다른 감정이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서연과의 혼례라니……. 아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망설였던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애쓰는 사이, 어느덧 익숙한 길목에 접어들고 있었다. 저 멀리,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밖에 나와 서성이고 있는 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승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왜 밖에 나와 있으십니까? 신시(申時:오후 세시에서 다섯 시까지) 이후로는 날이 제법 쌀쌀합니다."

 "이제쯤 오실 때가 되었을 것 같아 나와 보았습니다. 이리 얼굴을 뵈었으니 저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를 기다리시느라 시간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오늘은 저도 이만 의원 문을 닫을 생각이니,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둘러 문단속을 마친 승원은 서연과 함께 길을 나섰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길이 어두운 것은 아니었으나, 평소보다 늦어진 시각이라 서연을 혼자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나란히 길을 걸으면서도 서연이 아까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자, 승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걱정도 되고 궁금증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먼저 말씀하시지 않는 일을 제가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역시나 사려가 깊은 여인이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비가 누구인지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왠지 서연에게 라면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승원은 서연의 단아한 옆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서자입니다. 병조 판서 최윤덕 대감이 제 아비입니다. 열 살이 되던 해 그 댁에 맡겨졌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집을 나와 쭉 외조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 집을 나온 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넘었군요."

 아까 하인의 방문으로 인해 승원이 서자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집안의 자제란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 왜 병판 대감께서는 그리 오래전에 집을 나온 스승님을 다시 찾으시는 겁니까?"

 "제가 무과를 치르길 원하십니다.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 가문에 보탬이 돼라 하시더군요."

 "아……."

 무과라니… 의원인 승원을 늘 보아온 서연에게 무관이 된 승원의 모습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다. 허나 서자인 승원이 문과를 치를 수가 없으니, 병판 대감도 무과를 종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스승님은… 무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한때는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자 관직을 얻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병서도 열심히 읽고, 무예를 익히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제 팔뚝 보이십니까? 의원치고는 제법 우람할 텐데, 하하!"

 의원을 나설 때만 해도 서릿발같이 냉기가 흐르던 승원이었으나, 서연과 함께 있으니 어느 순간 농을 할 만큼 그 싸늘함도 녹아 있었다. 그런 승원의 모습에 서연도 안심이 되어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제게는 의원인 스승님이 익숙하긴 하지만, 의원이건 무관이건 그 본질은 최승원이라는 같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떤 길이건 스승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

 서연의 맑은 눈동자가 승원을 향해 곱게 휘며 아름다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승원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야 말았다. 서연과 함께 있는 것이 편안했던 이유는 단순히 사제지간의 정 때문이 아니라, 이 여인을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그녀가 계속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혹여나 낭자에게 다른 마음은 먹지 말게나.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일세.'

 문득 도윤이 처음 의원을 찾아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시작되어 버린 마음을 어찌한단 말인가……? 승원은 해사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서연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았다. 앞으로 서연을 어찌 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자신이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면 오히려 서연과 사이가 어색해지기만 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서연의 마음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일 테니.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토해 낸 승원은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홀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는 승원의 뒤로 회색빛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뒷모습에 숨길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 났다. 오늘 하루는 승원에게… 참으로 길고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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