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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8. 2024

35장. 붙잡힌 현감의 아들

 옥구현 동쪽 10리에 위치한 박지산(朴只山)은 지세가 험하고 좁아 오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숨어 지내야 하는 자가 머물기에는 아주 적합한 은신처였다. 전(前) 현감의 아들이 박지산 기슭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현규와 덕수는 몸이 날랜 수하 몇을 데리고, 산 곳곳을 수색한 끝에 작은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산 깊숙한 곳에서도 후미진 도린곁에 자리한 오두막이라 찾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찾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던 덕수의 말이 헛말은 아니었던지, 덕수는 제가 가진 모든 정보통을 동원해 결국 현감의 아들의 행적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오두막 근처에 매복을 한 뒤 동태를 살폈으나, 집을 비운 것인지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예가 확실한 겐가?"

 현규가 소리를 죽여 덕수에게 물었다.

 "확실합니다. 먹을거리라도 구하러 잠시 나갔나 봅니다."

 현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오두막을 주시했다. 옥구현에 머문 지도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한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도윤에게 하루빨리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고 싶었으나, 드러내놓고 현감의 아들을 쫓을 수는 없어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덕수가 이곳 사정에 밝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지체되었을 것이었다.

 "저, 그런데 그… 초희말입니다……. 정말로 한양으로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눈을 부릅뜨고 한참 동안 오두막을 지켜보던 덕수는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잠시 숨을 돌리며 현규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평 나리의 뜻일세. 이번 일이 끝나고 한양에 돌아갈 때, 함께 데려갈 참이네."

 "그러면… 초희는 지평 나리 댁에서 지내게 되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네. 자세한 건 지평 나리가 알아서 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초희가 연주하는 현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위해서는 정말로 잘된 일입니다. 그러잖아도 양반가의 여식이었던 아이가 관기로 온 것이 마음에 쓰였었는데, 이리 운이 트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아이가 올해 몇 살이라고 하였지?"

 "올해 아마 열넷이 되었을 겁니다."

 현규는 초희의 나이가 열넷이란 사실이 놀라웠다. 하도 앳되어 보여 아직 열한, 두어 살밖에 되지 않은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어린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초희란 아이의 면천에 필요한 삯을 준비해 줄 터이니, 한양에 올라올 때 그 아이를 데려와주게.'

 도윤은 한양에 올라가고 난 뒤, 현규에게 생각지도 못한 분부를 내렸다. 자신의 상관이 그 어린 기녀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면천까지 해서 그 기녀를 한양에 데려가리라곤 현규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허튼 일을 하지 않는 도윤의 성정을 알기에 현규는 두 말하지 않고 도윤의 뜻을 따랐다.

현규가 잠시 초희에 대한 일을 생각하는 사이, 날이 저물어가는 어스름을 틈타 오두막으로 들어서는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현규와 덕수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죽이고 오두막으로 접근했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은 오두막을 포위하고 서서, 안에 있던 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퇴로를 모두 차단했다. 현규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이의 침입에 놀란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뉘, 뉘시오?"

 현규는 손에 들고 있던 용모파기(容貌疤記)와 사내의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핼쑥해진 얼굴이 그림 속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눈썹과 눈매는 그림과 꼭 닮아 있어 같은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내는 무언가 겁에 질린 듯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현규를 바라보다, 이내 현규의 옆에 있던 덕수를 알아보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새로 부임한 현감 나리셨구려. 난 또……."

 사내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규 일행에게 붙잡혀서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가 사내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듯했다. 현규와 덕수는 사내를 포박한 뒤 날이 완전히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관아로 돌아왔다. 덕수가 먼저 동헌으로 들어가 아전들이 퇴청한 것을 확인한 뒤 노비들까지 모두 물린 뒤에야, 현규가 붙잡힌 사내와 함께 관아 내실로 들어섰다.

 "옥구현 전(前) 현감 김정무의 아들, 김상민. 그게 네 이름이 맞느냐?"

 상민은 제 이름이 불리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비가 축적한 재물은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것만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혹 다른 일을 해주고 대가로 받은 것들은 아니더냐?"

 현규의 물음에 흠칫한 상민은 잠시 눈빛이 흔들리긴 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희 부자를 사주한 이가 조정의 대신들 중에 있느냐?"

 "……."

 연이은 침묵에도 현규는 조급해하지 않고 냉철한 태도로 심문을 이어갔다.

 "다시 묻겠다. 너희 부자에게 뇌물을 주고 일을 시킨 이가… 혹 영상 대감은 아니더냐?"

 침묵으로 일관하던 상민이 영상 대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前) 현감의 아들을 잡게 되면, 영상 대감을 언급하며 그자를 한 번 떠보게.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일은 필경 영상 대감과 관련이 있을 것이네.'

 도윤의 지시대로 영상 대감의 이름을 들먹이자마자 반응을 보이는 상민의 모습에, 현규는 과연 제 상관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영상 대감이 너희 부자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사주했더냐?"

 현규의 입에서 영상 대감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벌벌 떨던 상민은 급기야는 무릎을 꿇고 현규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살, 살려주십시오, 나리! 저희 부자는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이리 붙잡힌 것을 알면 영상 대감이 반드시 저를 죽일 것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제 아비도 없애려 들 것이 분명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리!"

 "진정해라. 앞으로 너는 국법에 따라 다스려질 것이다. 아무리 영상 대감이라 하여도 나라의 죄인을 사사로이 해할 수는 없다."

 그게 사실인지 확인을 요하는 듯한 상민의 불안한 눈동자에, 현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와 네 아비가 백성들을 수탈하고, 영상 대감에게 뇌물을 받은 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허나 영상 대감의 죄를 밝히는 데 협조한다면, 정상이 참작되어 형량이 줄어들 것이다."

 "제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영상 대감입니다. 제 아비가 감찰에 걸려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살려면 저라도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제가 붙잡히지 않는다면, 영상 대감이 섣불리 제 아비를 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마저 이리 잡히게 되었으니……."

 "네가 붙잡힌 것은 비밀에 부칠 생각이다. 한양에 올라가는 대로 너를 호위할 무사들을 보내 은밀히 너를 한양으로 압송할 것이다. 의금부에 가서 네 아비와 함께 제대로 죗값을 치르도록 하거라. 그동안은 현감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러니 네 신변에 대해서라면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냉철하고 침착한 현규의 목소리에 상민은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헌부 관원에게 붙잡히게 된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언제 잡힐지 모른 채 도망자 신세로 숨어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옥에 갇혀 있는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 안정을 되찾은 상민은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결심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리 위험한 일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텐데, 흑흑… 평생 이런 촌구석에서 현감 노릇이나 하며 생을 마칠 줄 알았는데, 한양에 올라가 그럴듯한 관직을 얻을 수도 있단 생각에 제 아비가 영상 대감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였지요……."

 "영상 대감이 너희 부자에게 명한 일이 무엇이었더냐?"

 "사람을 찾아달라 하였습니다……. 그자의 행적을 하나씩 쫓을 때마다 두둑이 사례도 받았습니다……."

 상민은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살피더니,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

 "수년 전 소론들이 나주에서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이려다가 발각당했던 사건이 있었지요……. 그 나주괘서사건의 주동자였던 윤지의 수하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이름이 한용수라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 중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은 자였습니다."

 현규는 상민의 입에서 나온 한용수라는 이름을 듣곤 너무 놀라 어안이 입이 쩍 벌어졌다. 제 상관이 몇 년째 행적을 쫓고 있는 한용수가 아니던가? 그런 한용수를 영상 대감 또한 찾고 있었다니……!

 "한용수는 윤지의 수하가 되기 전, 옥구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영상 대감은 옥구현 현감인 제 아비를 통해 한용수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좇으려 했지요. 저희 부자는 과거에 그자를 알았던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해 한용수의 거처가 될 만한 곳을 전부 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자의 거취를 알아내게 되었는데……."

 상민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기라도 하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게… 어디더냐?"

 조심스러운 현규의 물음에 상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한용수가 정말로 거기 있는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아비가 잡혀 들어갔고, 저도 이리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제가 얻은 정보로는… 한용수는 지금 성균관 반촌에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어느 현방(懸房)에서 숨어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한용수가 한양에, 그것도 반촌에 있었다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용수가 지척에 있었다니 두 귀로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한용수가 한양에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관군조차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반촌이라면 더더욱. 현규는 규찰 업무를 마무리 짓고 내일 당장 한양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영상이 행한 일들의 꼬리를 밟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사실이 현규의 가슴을 뛰게 했다. 현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한용수를 찾아 내리라 다짐했다.

 모든 심문을 마친 현규는 덕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조심스럽게 내실로 들어서던 덕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상민을 흘끗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전 현감의 아들이 그의 아비와 함께 무슨 일을 해오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덕수는 심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을 굳이 알려하지 않고, 입이 무거운 것은 덕수가 가진 큰 장점이었다.

 "이제 저자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의금부로 보내 제 아비와 함께 죗값을 치르도록 할 것이네. 지금 저 몸으로는 한양까지 가기 힘들 것이니 일단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게. 한양에 돌아가는 대로 호위 무사들을 보낼 테니 그동안은 자네가 잘 감시해 주게."

 덕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 옥사에 상민을 투옥했다. 죄인인 상민을 수감하는 동시에 영상으로부터 상민을 지켜줄 은밀한 공간이었다.

 "한양으로 무사히 압송할 때까지 철저히 지켜주게."

 "염려 마십시오, 나리. 비밀 옥사는 대대로 현감들만 아는 공간입니다. 이곳에 있는 한 안전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한양으로 올라가시는 게지요?"

 "서계(書啓) 작성을 마치고 난 뒤 아침 일찍 바로 길을 떠날 것이네. 사실 자네가 워낙 잘하고 있어, 규찰할 것도 별로 없었네. 서계에 너무 자네 칭찬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

 "허허, 빈말이라도 듣기에는 좋습니다, 나리. 그래도 이리 갑자기 떠나시게 되니 섭섭합니다. 아직 나리와 편하게 술잔 한 번 주고받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한양으로 한 번 오게나. 내 거하게 대접 한 번 하겠네."

 "나리,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보기보다 엄청 많이 먹습니다. 괜히 불렀다고 후회하시면 안됩니다, 껄껄. 반드시 한양에 가서 지평 나리도 뵙고, 초희 얼굴도 볼 겁니다."

 "이번 일에는 자네 공이 크네. 자네가 오면 지평 나리도 기뻐하실 걸세. "

 현규는 사람 좋은 얼굴로 환히 웃고 있는 덕수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역시 지평 나리가 사람을 제대로 본 것이었다. 덕수는 좋은 관리였을 뿐만 아니라, 덕수 덕분에 상민을 붙잡아 한용수의 행적까지 알게 되는 수확을 거두었다. 이제 덕수는 그저 작은 시골 마을의 현감이 아니라 자신들의 든든한 동지였다.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길을 떠나야 하는 현규를 위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덕수가 먼저 방으로 돌아가고 난 뒤, 현규는 혼자 남아 짙은 어둠에 잠긴 마을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모든 것이 밤의 고요 속에 묻힌 가운데 푸른 달빛만이 고고(孤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양에 돌아가고 나면, 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가끔 생각날 듯했다. 순박하고 사람 좋은 덕수의 얼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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