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희야, 이곳은 전(前) 대제학이셨던 민성렬 대감의 댁이란다. 지금은 그분의 따님이신 서연 아씨가 유모와 함께 살고 계신 곳이지. 지평 나리께서 너를 이곳으로 데려다주라고 명하셨단다."
옥구현을 떠나올 때부터 반쯤 넋이 나가있던 초희는 옆에서 들려오는 현규의 묵직한 음성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간밤에 덕수로부터 자신이 감찰 나리와 함께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초희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떠나라는 말에 사람들과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날이 밝은 대로 정신없이 길을 나선 터였다.
'초희야, 이제 너는 기녀가 아니란다. 지평 나리가 너를 면천하여 주셨으니, 나리를 만나거든 꼭 감사 인사를 드리거라. 그리고… 부디 그곳에 가서 무탈히 잘 지내거라…….'
덕수가 마지막으로 제게 해주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초희는 자신이 더 이상 기녀가 아니란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지평 나리께 가야금을 연주해 드렸을 뿐인데, 이리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니 마치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초희를 보며, 현규가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도 지평 나리의 명에 따랐을 뿐이라 자세한 일은 잘 모른단다. 나리께서 시간이 나시는 대로 이곳에 너를 보러 오실 게다."
"저… 그런데, 그 서연 아씨란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찌 저를 이곳에 보내신 것인지……."
"서연 아씨는 지평 나리의 정혼녀이시다. 아주 아름답고 영민한 분이시지. 그 미모만큼 성품 또한 고운 분이시라 분명 네게도 잘해주실 게다."
"아……."
초희는 제가 지금 와있는 곳이, 지평 나리와 정혼을 한 분의 집이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평 나리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연 아씨란 분이 자신을 반겨줄지 걱정스러운 마음부터 앞섰다. 현규는 머뭇거리며 제 눈치만 보는 초희의 모습에 부러 더 다정한 목소리로 초희를 안심시켜 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주 상냥하고 좋은 분이시란다."
한시바삐 사헌부로 복귀해야 하는 현규인지라 더는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낯선 곳에 혼자 남게 되어 불안한 초희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나, 서연 아씨와 영주댁이라면 초희를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 분명했다. 현규는 다시 한번 초희를 안심시킨 뒤 서둘러 문을 두드렸다. 현규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온 영주댁이 현규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러다 곧 현규의 옆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곤 곧 그리로 시선을 옮겨갔다.
"아이고, 아씨가 바로 초희 아씨로군요! 잘 오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자신을 아씨라 부르는 영주댁의 말에 초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씨라니요……. 가당치 않은 호칭입니다. 집안이 망하고 관기가 되었다 면천된 몸입니다. 그저 초희라고 불러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은 관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반가의 여식이었던 분을 어찌 제가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아씨는 이곳에 비복으로 오신 게 아니십니다. 아씨야말로 저를 영주댁이라 부르시고 말씀을 낮추십시오."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인데도 저를 따스히 대해주는 영주댁의 모습에 초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영주댁은 그런 초희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얼른 초희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럼 초희를 잘 부탁하네. 급히 들어가 봐야 해서, 나는 이만 가보겠네."
"염려 마십시오, 나리. 초희 아씨는 제가 잘 돌봐 드리겠습니다. 그럼, 살펴가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초희를 환대해 주는 영주댁을 보며 마음이 놓인 현규는 그제야 서둘러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영주댁을 따라 서연이 기다리고 있을 별채로 향하며, 초희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았다. 가세가 기운 탓에 사대부가의 저택이라기엔 그저 초라하기만 한 곳이었다. 하지만 잘 가꿔진 화초들이 그나마 소박한 집 곳곳에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싱그러운 초록잎과 다채로운 빛깔의 꽃들이 어우러져,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이끌었다. 향긋한 꽃향기를 들이마시던 초희의 얼굴에도 어느덧 긴장감 대신 아이다운 호기심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아씨, 옥구현에서 초희 아씨가 지금 막 당도하셨습니다."
후원에서 약초밭을 살펴보고 있던 서연이, 영주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영주댁의 곁에 서 있던 여자아이를 발견하곤, 곧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와……."
초희는 서연을 처음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수수한 무명옷을 입고,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기방의 화려한 미인들과는 다른 청초한 아름다움이 이 댁 아씨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듯했다.
'이리 고운 분이 지평나리의 정혼자였구나…….'
옥구현에서 제가 현을 연주했던 그날, 도윤의 눈에 어린 그리움을 읽었던 초희는 그 그리움이 바로 이 아씨를 향한 것이었단 걸 깨달았다. 초희는 제 쪽으로 걸어오는 서연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서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곱게 미소 띤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그 아름다움도 배가 되는 것만 같았다. 서연은 수줍은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초희에게 다가가 천천히 얼굴을 살펴보았다. 올해 열 넷이라고 들었는데, 아이는 나이보다 키도 작고 앳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한창 자랄 시기에 집안이 망해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리라……. 짐이라 할 것도 없는 작은 봇짐 하나에, 제 키보다 큰 가야금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아려왔다.
"네가 초희로구나……. 먼 길 오느라 힘들진 않았니? 이리 만나게 되어 정말로 기쁘구나."
"서연 아씨께 인사 올립니다. 문초희라고 합니다."
서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초희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나를 아씨라 부를 것 없다. 우리 둘 다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이기는 매한가지인데, 너와 내 처지가 무어 다를 게 있겠느냐? 나는 너를 여동생으로 여길 것이니, 너도 나를 언니라 불러주면 좋겠구나."
초희는 자신을 향한 서연의 부드러운 눈빛에 목이 메어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문이 몰락한 뒤 온갖 고생을 하다, 부모가 갚지 못한 빚 때문에 관기로 팔려가기까지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덕수가 부임해 온 뒤로는 지내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리 면천이 되어 다시 자유의 몸이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초희였다. 어찌 제게 이런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인지……. 초희는 아직도 모든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초희 아씨, 혹시 잡숫고 싶은 것은 없으십니까? 제가 솜씨 한번 발휘해 볼 터이니 말씀만 해보세요."
"……."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라거나, 먹고 싶었던 음식은 없었니?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 보려무나."
초희가 아무 말 못 하고 머뭇거리기만 하자 서연이 초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다정히 물어왔다.
"그… 개떡… 개떡이 먹고 싶습니다."
"예? 개떡 말씀입니까?"
이틀 전 돌쇠가 곳간을 넉넉히 채워둔 터였다. 무엇이건 초희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고자 했던 영주댁은 초희의 입에서 나온 '개떡'이란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맛난 것들을 다 제쳐 두고 하필 개떡이라니…….
"이제 여기가 네 집이고, 우린 한 식구란다. 누가 될까 하여, 부러 개떡이 먹고 싶다 한 듯한데 그럴 것 없다. 진짜로 네가 먹고 싶은 것을 말해도 된단다."
"참말로 개떡이 먹고 싶습니다……. 집안이 망하고 난 뒤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배를 곯기 일쑤였습니다. 그나마 어머니가 개떡이라도 해주시는 날이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오늘도 또 개떡이냐고 먹지 않겠다며 어머니께 떼를 쓰곤 했지요. 그때는 정말 개떡이 지긋지긋했습니다……."
지난날을 떠올린 초희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잠시 숨을 고른 초희는 목멘 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헌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개떡이 그리웠습니다. 이젠 아무리 먹고 싶어도 개떡을 해주실 수 있는 어머니가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그때 불평하지 말고 주시는 대로 감사히 먹을 걸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초희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두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동안 꾹꾹 참고 있었던 그리움이 제게 한식구라 말해주는 서연과 영주댁을 만나니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이었다. 초희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서연이 다가와 초희를 꼬옥 안아주었다. 작고 여린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그동안 초희가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을 다독여 주었다.
초희를 만나고 나서 서연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자신 또한 부모님을 잃고 혼자 남겨진 그 아픔이 잊힌 것이 아니라 억지로 참고 있었단 것을……. 사실은 너무 무섭고 또한 외로웠단 것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던 도윤이, 제게 이 아이를 보내준 것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아이였지만 진짜 여동생이기라도 한 것처럼 초희가 가깝고 친밀하게만 느껴졌다. 초희는 서연의 품에서 그동안 참았던 서러움을 다 쏟아 내었다. 서연 또한 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같은 아픔을 겪은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의 상처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옆에서 같이 눈물을 쏟고 있던 영주댁이 소매를 겉어 붙이며 씩씩하게 말했다.
"초희 아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쇤네가 아씨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것과 똑같은 개떡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개떡이야 저도 어릴 때 하도 많이 먹어본 것이라 누구보다 잘 알지요."
하도 울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영주댁의 말에 초희가 금방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제 그렇게 서럽게 울었냐는 듯 초희는 밝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제 아비는 나주목 창평현 현령을 지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다른 피붙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리 은혜를 베풀어주시어 저를 이 댁 사람으로 받아주셨으니, 앞으로는 서연 아씨를 친언니처럼 여기며 손윗사람에 대한 예를 다하겠습니다."
"나는 홍문관 대제학이셨던 민성렬 대감의 여식 민서연이란다. 나 또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보다시피 가족이라곤 유모 한 사람뿐이란다. 앞으로 우리 세 사람,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자꾸나."
초희가 감격에 찬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언니… 저도 영주댁을 유모라 불러도 괜찮을까요?"
"초희가 유모라 부르고 싶다는데, 유모 생각은 어때?"
"아이고, 저야 좋습지요……. 초희 아씨, 앞으로는 제가 아씨에게도 유모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영주댁의 말에 초희가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겨 얼굴을 비볐다. 서연도 어릴 땐 늘 영주댁에게 이리 애교를 부리곤 했으나, 집안이 망하고 철이 든 뒤론 한 번도 이리 행동해 본 적이 없었다. 영주댁은 오랜만에 보는 어린 아씨의 애교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겨우 사람 하나 더 늘었을 뿐인데도 집안에 다시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영주댁이 개떡을 만드는 동안 초희가 가야금을 내려놓고 현을 타기 시작했다. 서연은 초희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두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윤이 말했던 대로 초희가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구슬픈 듯하면서도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오는 감동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서연은 초희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현의 소리를 들으며 어렸을 때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달라 부러 잊고 살려고 했던 기억들이었다. 자상했던 아버지, 아름다웠던 어머니, 지금처럼 유쾌했던 휘… 그리고 언제나 제 곁을 지키던 도윤의 모습까지…….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숨 막히도록 그리운 순간들이었다. 서연은 오늘 하루만 그 기억들 속에 머물기로 했다. 은은한 선율에 소중한 시간들을 잠시 묶어두고, 오늘 하루 만이라도 그 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