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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Nov 04. 2024

38장. 반촌 잠행에 나선 도윤과 휘

 성균관 노비들이 거주하는 마을 반촌(伴村). 성균관을 감싸 흐르는 반수(伴水)를 중심으로 동반촌과 서반촌으로 나뉜 마을은 저녁 어스름이 깔려 오자 유흥을 즐기러 나온 유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푸른색 행의(行衣)를 입은 유생들이 넘쳐났지만, 같은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두 유생이 있었다. 유건(儒巾) 아래에 드러난 단정한 얼굴은 한 번 보면 눈을 떼기 힘들 만큼 미려했고, 총기 가득한 눈빛에 훤칠한 체격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헌헌장부가 따로 없었다. 두 유생을 지나치는 이들마다 탄복을 금치 못하며 그들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반궁(伴宮)에 저런 미남들이 있었나? 도대체 저 유생들은 누군가?"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네. 이번에 동재에 들어온 신래(新來)들인가?"

 "서재에선 본 적이 없으니, 동재생이지 않겠는가? 하, 저런 얼굴로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저 얼굴로 살아보고 싶군."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을 쳐다보는 유생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는 도윤과 달리, 휘는 아까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허, 거참. 잠행을 하려 해도 지나치게 잘생긴 이 얼굴이 방해가 되는군 그래."

 "곧 날이 어두워지니, 그렇게 자라처럼 목을 빼들고 두리번거리지만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걸세."

 "아니, 자네는 어찌 이런 쪽으론 그리 무딘 겐가? 그 얼굴 그렇게 쓰려거든 차라리 나를 주게! 날이 저문다고 그 얼굴이 어디 숨겨질 얼굴이던가?"

 휘는 진짜로 답답하기라도 한 듯 제 가슴을 쿵쿵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김휘가 패배를 인정한 용모가 아니던가? 저런 얼굴을 하고선 제 생김새에 도통 관심도 없는 도윤이 휘로선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열을 올리는 휘가 되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더니, 왜 저리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윤과 휘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혀를 끌끌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막역한 지기였지만, 워낙 성정이 달라 가끔은 나이 어린 사내아이들처럼 티격태격하곤 했다. 하지만 그 다툼은 채 일각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답답한 것을 참지 못하는 휘가 주로 먼저 말을 걸었고, 도윤도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받아주곤 했던 것이다. 오늘도 역시 먼저 말문을 뗀 쪽은 휘였다.

 "뒤에 누군가가 따라붙은 것 같군."

 "셋 정도 되는 것 같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몸을 홱 돌려 자신들을 따라오던 자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영상이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 여겼건만, 뜻밖에도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청금복을 입은 유생 셋이었다. 유생들은 갑자기 멈추어 선 도윤과 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서로 논의가 끝난 것인지, 세 유생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유생 하나가 앞으로 나와 큰소리로 말을 꺼냈다.

 "큼큼, 나는 서재의 장의(掌議), 박영민이라 하네. 자네들 이번에 동재에 새로 들어온 유생들인가?"  

 자신을 장의라고 밝힌 유생의 모습에 휘는 어쩐지 장난기가 동했다. 휘는 도윤에게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듯 눈짓을 보낸 뒤 세 유생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번에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 유생, 김휘라 합니다. 저 친구는 저와 함께 들어온 이도윤이라 하고, 저희 둘 모두 동재에 배정되었습니다."

 "역시나 동재생이었군그래. 서재생이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낯선 유생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하도 범상치가 않아 슬며시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두 유생은 두 사람이 이번에 입학하게 된 신래란 말에 그제야 곁으로 다가와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자네들 신방례(新榜禮)는 제대로 준비했겠지?"

 "어디 그 잘난 얼굴만큼, 신방례에 가져 올 음식들도 훌륭한지 지켜보겠네."

 아직도 신방례에서 신래들을 괴롭히는 악습이 남아있다니……. 거들먹거리며 신방례를 거론하는 두 유생의 말에 도윤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두 유생은 자신들을 향한 매서운 눈빛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제 막 성균관에 입학했다는 신래라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던 것이다. 휘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더니, 영민에게 다가가 넌지시 한 마디를 던졌다.

 "제가 알기로는 예전에 서재에 입학했던 두 유생의 신방례 이후로는 그리 요란하게 신방례를 치르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었습니까?"

 아까부터 무언가를 생각해 내느라 애쓰고 있던 영민이, 서재에 입학했던 두 유생이란 말에 화들짝 놀라 휘와 도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두 신래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이 과거 성균관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설적인 두 유생, 김휘와 이도윤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균관 유생 시절 수려한 외모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최단 시간에 대과에 급제해 성균관을 나간 걸로 유명한 두 사람이 아니던가? 지금은 각각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가 되어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걸로 아는데, 어찌 여기 있는 신래들의 이름이 그 두 사람과 같은 것일까……?

 성균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다른 두 유생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장의인 영민은 달랐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슬며시 두 사람을 쳐다보던 영민은 순간 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분명히 보고 말았다! 저를 향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두 눈을. 그것은 결코 신래가 가질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민은 자신을 보는 휘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끼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단지 이름이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대단하신 선진들이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이었다! 휘는 눈치 빠른 영민의 모습에 그가 괜히 장의가 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영민은 두 유생이 거듭 신방례를 들먹이려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유생을 잡아당겼다.

 "이, 이만 가보세. 동재생들 일이야, 동장의가 알아서 하지 않겠는가?"

 "장의, 왜 그러십니까? 이참에 신래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요."

 "맞습니다. 우리 선진들이 나서지 않으면, 뭣도 모르는 신래들이 무얼 알겠습니까?"

 갑자기 자신들을 끌어당기는 장의의 모습에 의아해진 두 유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글쎄 가자면 갈 것이지, 무슨 말들이 그리 많은가! 장의인 내 말이 우스운가?"

 영민은 자신의 만류에도 눈치 없이 일을 키우려는 두 유생의 모습에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휘가 그런 영민에게 다가가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영민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다.

 "성균관 서장의 박영민…….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신래들을 생각해 주시는 배려심만큼이나 그 입도 무거우시리라 믿겠습니다."

 영민은 휘의 말에 역시나 제 짐작이 맞았단 걸 알곤, 이젠 얼굴이 아예 사색이 된 채로 두 유생을 끌고는 줄행랑을 쳤다. 저 두 사람이 어찌 유생의 복장을 하고 반촌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입을 다물라는……. 영민은 오늘 있었던 일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제라도 두 사람을 알아보고 함부로 굴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나치게 잘난 얼굴을 한 신래들을 조금 괴롭혀볼까 했다가 하마터면 큰 실수를 범할 뻔했던 것이다.  다시 돌이켜봐도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유생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도윤과 휘도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와보는 곳이었지만, 휘는 제 집 앞마당을 거닐기라도 하는 둣 내딛는 걸음마다 거침이 없었다.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하게 걷는 모습이 누군가의 행적을 쫓고 있는 긴박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저 밤나들이하러 나온 한가한 유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그런 휘가 한편으론 기가 차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 잠행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이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휘는 얼핏 딴 데 신경을 쏟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걸음은 정확히 목표 지점을 향했고 걷는 속도도 도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도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휘처럼 저리 어수선히 행동하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결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으리라……. 주위를 둘러보며 산만하게 움직이던 휘의 발걸음이 어느 주막 앞에 이르자 그대로 멈추었다. 저녁 장사를 위해 등롱을 내걸고 있던 주모가 휘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져선 부리나케 달려왔다.

 "주모, 내가 왔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쉿……. 목소리를 낮추게. 지금 나는 성균관 유생으로 이곳에 온 것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성균관 유생 시절 반궁을 잘 벗어나지 않았던 도윤과 달리 반촌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휘였다. 반촌의 모든 정보가 모여드는 주막은 휘의 주활동 무대였고 당연히 이곳 주모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주모는 오랜만에 보는 휘의 모습이 더없이 반가웠으나 워낙 눈치가 빨랐던지라, 별다른 내색 없이 막걸리 한 사발과 국밥 두 그릇을 상에 얹어주며 휘의 옆에 걸터앉았다. 주모는 국밥을 한 술씩 뜨고 있는 휘와 도윤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두 나리는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을 나간 지도 벌써 여러 해가 흘렀건만, 어찌 변한 게 하나도 없을까? 아니, 오히려 세월이 흐르니 성숙함까지 더해져 더욱 멋진 사내가 된 듯하였다.

 "주모, 내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네."

 두 사람의 인물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주모는 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휘는 수저를 멈추지 않고 짐짓 먹는 데만 집중하는 체하며, 주모에게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반촌에 현방(懸方:소고기를 매달아 놓고 파는 집)이 몇 이나 있는가?"

 "지금은 다섯 곳 정도 됩니다."

 "현방을 운영하는 자들 중, 혹 말씨가 다른 자가 있는가?"

 "반촌에 거주하는 반인들은 대부분 개성에서 이주해 온 자들로 오래전부터 터를 이루어 살고 있습지요. 말씨가 다른 이가 있다면 금방 눈에 뜨일 겝니다. 제가 알기론 그런 자는 없습니다"

 유생의 모습으로 잠행에 나선 두 사람이 반촌 내의 모든 현방을 일일이 뒤지고 다닌다면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주모로부터 먼저 정보를 얻고자 했던 휘는 주모의 대답에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 말을 못 하는 이는 없는가?"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서반촌 제일 안쪽 현방에는 말 못 하는 자가 하나 있긴 합니다. 그래도 귀머거리는 아닌지 말귀는 알아듣습니다."

 "그자가 언제부터 반촌에 있었는지 아는가?"

 "가만있어 보자……. 한 삼 년쯤 됐습지요. 현방 주인의 육촌 형이라는데, 다른 곳에서 현방을 하다가 하도 관아에서 수탈을 해 대는 바람에, 못 견디고 이곳으로 왔다 들은 것 같습니다."

 삼 년 전이라 하면, 김상민이 한용수의 마지막 행적을 놓친 시기와 일치했다. 도윤과 휘의 눈이 번뜩였다.

 "주모, 고맙네! 내 다음에 다시 한번 꼭 들르겠네."

 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주모의 손에 묵직한 전낭을 쥐어준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반촌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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