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를 지나 한참을 달린 끝에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현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어 찾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장사치에게는 영 목이 좋지 않은 곳이었으나, 숨어 지내야 하는 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부인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반촌 내에서도 이리 구석진 곳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숨어 있었으니 쉽게 발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윤과 휘는 숨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가게 앞을 살폈다.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인지 날이 어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등록조차 걸려 있지 않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도윤이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휘가 비릿한 피냄새에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들어간 도윤이 시신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용수인가?"
도윤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자의 용모파기를 본 적이 있네. 살해당한 자는 아마도 한용수의 육촌 동생이라는 자인 듯 싶네."
"우리가 한 발 늦었군……."
시신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어 자객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용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미리 몸을 숨겼거나 아니면 붙잡혔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도윤은 한용수가 몸을 숨긴 쪽에 무게를 실었다. 한용수는 무예를 익힌 자였다. 만약 한용수가 붙잡혔다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시신 하나 놓인 것 말고는 별다른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게다가 만약 시신이 한용수였더라면 이리 눈에 띄게 시체를 남기지는 않았을 터. 자객들이 굳이 이렇게 시체를 두고 간 이유는 아마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을 것이다.
자객이 반촌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한용수의 거취가 이미 영상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의금부에 갇혀 있는 현감 김정무나 옥구현 관아에 갇혀 있는 그의 아들 김상민 중 어느 한쪽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다는 뜻인데……. 갑자기 스치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 도윤은 휘를 남겨둔 채 홀로 의금부로 향했다. 의금부에 당도하자마자 옥사부터 찾은 도윤은 정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사헌부로 발길을 재촉했다. 도윤이 대장청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현규가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를 해왔다.
"지평 나리, 큰일 났습니다! 옥구현 관아에 산적 떼가 습격해 관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살아 나온 현감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아무래도 김상민을 노린 듯합니다……. "
김상민 하나를 없애기 위해 관아에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다니……. 도윤은 아무런 죄도 없이 희생된 옥구현 관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현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감찰방에서 지평 나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시겠습니까?"
도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덕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현규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도윤의 뒤를 따랐다.
"지평 나리! 송구합니다……. 김상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흑흑……."
덕수는 도윤을 보자마자 엎드려 사죄부터 했다. 도윤이 얼른 다가가 덕수를 일으켜 주었다.
"자네 탓이 아니네……. 이리 무사해서 참으로 다행이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어찌 김상민을 찾을 수 있었겠나? 아무 생각 말고 일단 몸부터 추스르게."
"살아남은 자들이 산적 떼의 습격이라 증언하고 있으나, 결코 일개 산적 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살수들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입은 부상을 보면 정확하게 급소를 피해 공격했습니다. 일부러 살려준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옥에 갇힌 죄수들을 노린 움직임이었습니다."
"다른 이들 앞에선 산적 떼에게 습격을 당했다고만 말하게.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위험해질 수 있네."
"알고 있습니다. 지평 나리와 감찰 나리 말고는 이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없습니다. 관아에 영상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던 듯합니다. 모두 옥구현 토박이들인 데다 애향심도 남다르고 다들 믿을 만한 자들이라 여겼는데……. 소인이 방심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지평 나리."
도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덕수의 잘못이 아니라 영상의 간악함에 누군가가 걸려든 것이었다. 영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약한 부분을 귀신같이 파고들어 그것을 치밀하게 이용하는 자였다. 영상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순박한 옥구현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도윤은 덕수에게 상감마마를 알현하면 산적 떼에게 습격당했다 보고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고을의 어수룩한 현감처럼 행동하라 일렀다. 김상민이 제거된 마당에 옥구현은 더 이상 영상에게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덕수의 안위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었다.
도윤은 구리개에 있는 승원의 의원을 덕수에게 소개해주었다. 승원이 의원으로서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으니, 덕수가 승원에게 치료를 받는 것이 좋으리라 여긴 것이다. 덕수는 며칠간 한양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한 뒤 옥구현에 돌아가기로 하고 현규와 함께 감찰방을 나섰다. 도윤은 영상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고 치밀한 것에 혀를 내둘렀다. 영상의 움직임을 조심하라는 윤수의 충고가 헛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영상보다 더 빠르고, 더 치밀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영상보다 먼저 한용수를 찾아내 그가 스승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사실을 밝혀 내리라. 도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영상과의 싸움에서 결코 패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반드시 이겨 볼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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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 안에서도 인적이 드문 뒷골목,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대장간에서는 지금 작업이 한창 중이었다. 추수기를 앞두고 밀려드는 농기구 주문으로 인해 제날짜에 물건을 대려면 새참 먹을 시간도 부족한 참이었다. 메질꾼 둘에 풀무꾼 하나, 대장장이까지 해서 도합 네 명의 장정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대장간의 주인인 대장장이 김석구는 달군 쇠를 두드리고 있는 메질꾼 하나를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함께 일하던 메질꾼 박 씨가 제 대장간을 차려 나가는 바람에 급하게 일꾼이 필요하던 차에 나타난 사내였다.
사내는 며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굶기까지 한 듯, 얼굴이 핼쑥하고 두 눈두덩이는 푹 들어가 있었다. 메질꾼을 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다짜고짜 메질 하나는 자신 있으니 자신을 써 달라 청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이를 들이는 것이 꺼림칙했으나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석구는 하는 수 없이 일단 일을 한 번 시켜보았다. 건장한 체구부터가 힘깨나 쓰겠다 싶긴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막상 쇠를 두드리는 것을 보니 혼자서 거의 두 사람 몫을 해내는 것이었다. 석구는 당장에 사내를 고용하기로 했다. 메질꾼이 메질만 잘하면 되지 다른 게 무어 더 필요하겠는가? 게다가 사내의 우직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윤 씨라고만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따로 삯은 필요 없다고 하였다. 처음에 경계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석구는 이제 윤 씨가 어디 다른 대장간으로 가버리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윤 씨처럼 불평도 없이 묵묵히 할 일을 해내는 메질꾼은 어디 가서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더군다나 삯도 바라지 않는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이보게들, 잠시 쉬었다 하세."
윤 씨의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며, 석구는 다른 메질꾼과 풀무꾼에게 신호를 보냈다. 윤 씨가 이곳에 온 뒤로는 오직 윤 씨의 몸 상태에 따라 휴식 시간을 정하고 있는 석구였다. 다른 일꾼들이 불만을 품기에는 워낙에 윤 씨의 일솜씨가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 씨, 자네도 좀 쉬었다 오게."
석구는 쉬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닥에 털썩 드러눕는 다른 일꾼들과는 달리, 여전히 메질을 멈추지 않고 있는 윤 씨에게로 다가갔다. 윤 씨는 그만하라는 듯 제 어깨에 손을 올리는 석구를 보고 난 뒤에야 하던 일을 멈추고 대장간 밖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대장간 대문 앞에 주저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고 있던 윤 씨는 문득 자신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간 안에서 하루 종일 쇠만 두드리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잊곤 했다.
이곳에서 윤 씨라고 불리고 있는 메질꾼……. 그는 바로 도윤이 그토록 찾고 있던 한용수였다. 용수는 반촌에서 현방을 하고 있는 육촌 동생의 도움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며 그곳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 전쯤 자신의 행적을 쫓는 사람들이 있단 것을 알게 되자마자 서둘러 반촌을 떠나왔다. 성균관 노비도 아니었던 그가 반촌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가축을 도축하는 솜씨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워낙에 이 일 저 일 안 해본 일이 없었던 용수는 온갖 잡기에 능했다. 다른 곳에서 현방을 하다 관리들의 수탈이 너무 심하여 못 견디고 문을 닫았다는 그를 반인들은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실제로 능수능란하게 도축을 할 수 있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용수의 육촌 동생이 하는 현방은 반촌 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관리들이 나올 때만 숨어 있으면 딱히 발각될 위험도 없었다. 용수는 다른 반인들이 하는 현방의 일을 도와주며 그들의 환심을 샀고, 그렇게 반촌에서 반인 행세를 하며 지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벙어리 행세를 하는 그와 딱히 말을 섞을 일도 없었기에 반인들 중에는 그가 진짜로 성균관 노비인 줄 아는 이들도 많았다.
용수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우직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곤 했다. 윤지가 용수를 신뢰하고 중히 썼던 것도 그의 성실함과 선량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촌에서 숨어 지내기를 삼 년. 그곳에서 그렇게 잊힌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용수는 고된 메질로 인해 손에 박인 굳은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이리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전하리라 믿었던 반촌도 발각된 터에, 대장간이라고 들키지 말란 법은 없었다. 문득 반촌에 있는 육촌 동생이 무사한지 걱정이 되었으나 지금은 제 코가 석자였다. 누군가의 안위를 보살피기에는 제 힘이 너무나도 미약했던 것이다. 용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답답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윤지 어르신의 명으로 한양에 있던 대제학 민성렬 대감을 찾아갔던 날 이후로 자신의 운명은 도망자라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거사에 앞서 민성렬 대감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윤지는 수하들 중 가장 몸이 날래고 믿음직한 용수를 한양으로 보냈다. 용수는 은밀히 대제학을 만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를 모의에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사실 성렬의 인품에 대해 익히 들어왔던 용수는 결과가 그러하리란 것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본 대제학은 소문으로 들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강직하고 고매한 선비였다.
대제학은 조정에 불만이 있다 하여 그릇된 방식으로 그 불만을 표출하고자 한다면 그 또한 의(義)가 아니니 다시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윤지를 설득하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자신에게 전해 주었다. 작금(昨今)의 상감마마께서는 당파 간의 균형을 위해 힘쓰고 계시니, 반드시 소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 하였다. 용수는 아직도 성렬의 그 형형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성렬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 용수는 그의 뜻이 옳음을 깨닫고 윤지에게 성렬의 진심을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용수가 나주로 돌아가 윤지를 만나기도 전에 괘서가 발각되어 버리고 말았다. 모의를 도모했던 소론들은 모조리 잡혀 들어갔고, 윤지 또한 전라 감사 조운규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용수는 관군 외에도 자신을 쫓는 세력이 있단 사실을 알곤 몸을 숨겼으나 얼마 가지 않아 영의정 김영환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대제학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영환은 자신에게 대제학이 역모죄에 동참하려 했다고 거짓 증언을 할 것을 종용했다. 거짓으로 증언만 해준다면 역모를 밝히는 데 일조한 공로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재물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용수는 영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처럼 행동하다 기회를 틈타 영환의 손아귀를 빠져나왔다.
사력을 다해 영환에게서 도망쳐 나온 용수는 죽은 듯이 숨어 지내며 바깥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대제학이 역모죄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대제학이 그리 된 것만으로도 미칠 노릇인데, 연이어 대제학 부부가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용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소론들의 규합은 나주괘서사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끝이 나버렸고, 소론들의 희망과도 같았던 대제학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용수는 답답한 마음에 더 이상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성균관 노비인 육촌 동생의 도움으로 반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평화로운 반촌에서 몸을 숨기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차츰 과거의 일들도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어느덧 자신이 진짜 반인(泮人)이라도 된 것처럼 그곳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리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영상의 손길은 결국 반촌까지 뻗쳐 왔던 것이다. 용수는 어차피 한 번은 죽게 될 인생, 대제학 대감의 억울한 누명이라도 제대로 벗겨 드리고 죽자 마음먹었다. 죽기 살기로 덤벼 들면 어떻게든 제 손에 있는 증좌를 세상에 알릴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대제학 대감에게 따님이 한 분 계셨는데…….'
용수는 성렬의 집에 갔던 날, 잠시 마주쳤던 그 댁의 어린 아씨를 떠올렸다. 아직 열두어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아씨였지만, 총기가 가득한 눈빛이 보통 영특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어이, 윤 씨! 어여 들어오게. 다시 작업이 시작됐네."
용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대장간 안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용수의 머릿속에는 성렬의 집에서 보았던 어린 아씨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달궈진 쇠를 힘차게 내리치며 용수는 성렬의 딸을 찾아야겠다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