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한용수의 행적을 쫓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도윤은 순휴일이 돌아오자마자 휘와 함께 서연의 집부터 찾았다.
"아이고, 도련님들. 어서 오십시오. 서연 아씨와 초희 아씨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영주댁을 따라 별채로 들어서니, 서연과 초희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친자매라 하여도 믿을 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지평 나리!"
별채로 들어서고 있는 도윤을 먼저 발견한 초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왔다. 그동안 지평 나리가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초희는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지평 나리,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나리는 제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잘 지내고 있었느냐? 좀 더 빨리 와 보았어야 하는 건데, 이제야 오게 돼서 미안하구나."
초희는 한결같이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대하는 도윤을 보며 목이 메어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 큰 은혜를 베풀어주고도 이렇다 할 생색 하나 없는 담백한 태도에 또 한 번 감동이 밀려왔던 것이다.
"지평 나리, 휘 오라버니, 지금 오시는 길이십니까?"
서연이 다가와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초희의 등을 쓸어주며 도윤과 휘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 서연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움을 눈빛에 담은 채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아이를 제게 보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서연의 뜻을 알아차린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어 보였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휘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휘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서연이 제 집을 찾은 도윤을 이리 반갑게 맞아준 게 도대체 얼마만의 일이란 말인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일말의 희망이 생기는 휘였다. 어쩌면 서연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서연에게 엄청난 위안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제게 보내준 도윤에게 서연이 얼마나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지 서연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역시 서연의 일에 관해서라면 도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서연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마저 알아차리고 그것을 늘 해결해주곤 하니 윤수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애초에 승산조차 없는 게지……. 휘는 새삼 벗의 사랑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옥구현에서 왔다는 아이구나? 나는 김휘라고 한단다. 빛날 휘(輝) 자를 쓰지."
"서연 언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문초희라고 합니다. 아, 저는 부를 초(招)에 기쁠 희(喜)를 씁니다"
초희는 호를 말하는 대신 한자의 뜻을 밝히는 휘의 모습이 생경하긴 했으나, 어쩐지 자신도 휘를 따라 말해 보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그 남다른 인사법이 조금 멋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도윤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 잘생긴 얼굴에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는데, 벗인 휘 또한 어찌나 인물이 훤한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나머지, 초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서연이 그런 초희를 보며 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서연의 눈에는 초희가 무얼 하든 그저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서연이가 동생이 생겨 좋은가 보구나. 얼굴이 아주 훤해졌다."
휘가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서연의 머리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일순 도윤의 얼굴이 굳는 것을 목격한 초희가 본능적으로 서연의 앞을 막아섰다.
"그, 그…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유별한 법인데, 언니께 이리 하시면 아니 될 듯하여……."
초희는 제 행동이 혹여나 휘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누가 뭐래도 도윤은 자신의 큰 은인이었다. 지평 나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발 벗고 나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초희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레 휘를 살펴보았다. 이 잘난 사내가 서연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드는 초희였다. 휘는 허공에 멈춘 제 손을 어색하게 바라보다 슬며시 손을 거두었다. 어릴 때부터 하도 격의 없이 지내오고 있는 지라 무심코 하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초희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도윤이 자신과 서연의 사이를 투기할 때마다 그걸 놀리는 재미가 얼마나 컸는데! 휘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윤은 무언가 미련이 남은 듯한 휘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잖아도 휘가 서연에게 저리 행동할 때마다 못하게 막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오곤 했던 도윤이었다. 제 반응이 재미있어 휘가 부러 더 그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얼굴부터 구겨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헌데 뜻밖에도 초희가 휘를 막아설 줄이야. 도윤이 초희를 쳐다보니, 앞으로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초희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뜻밖의 조력자가 생긴 도윤은 흡족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은 초희의 가야금 연주를 듣기 위해 사랑채로 건너가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초희의 가야금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휘는 초희가 줄을 튕기며 현을 가다듬는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이 아이가 그렇게 현을 잘 다룬단 말이지? '
기녀들이 연주하는 가야금을 듣는 데는 이력이 난 휘였다. 초희가 줄을 튕기는 모습부터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휘는 더욱더 초희의 실력이 기대되었다. 자세를 가다듬은 초희가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다. 오늘 초희는 그동안 연주하던 애달프고 구슬픈 가락 대신, 한없이 부드럽고 달달한 곡조를 들려주었다.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곡이었다.
휘는 초희의 놀라운 실력에 탄식하며, 연신 '좋다'를 연발했다. 기교가 완벽한 기녀들의 연주를 숱하게 들어왔지만, 초희가 연주하는 현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특별함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온갖 고생을 다하며 겪어 온 수많은 고충들이 나이 답지 않은 깊은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거기에 타고난 재능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서연은 두 눈을 감고 초희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몽글몽글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자꾸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감았던 눈을 뜬 순간, 저를 향하고 있는 도윤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잘생긴 얼굴에 싱긋 웃음이 번졌다.
쿵, 쿵…….
서연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도윤의 수려한 얼굴을 보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건만, 갑자기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유모에게 가서 다과가 다 되어가는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당황한 서연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 계속 있었다가는,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제 심장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초희의 날랜 움직임이 서연의 앞을 막아섰다.
"언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유모가 다과 만드는 것을 저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럼, 나도 같이……."
"그럴 것 없다. 내가 같이 가보마. 영주댁이 오늘은 어떤 걸 만들고 있을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구나. 서연이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서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휘와 초희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제 심장 소리를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과 단 둘만 남겨지다니……. 하지만, 달리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서연이 은근슬쩍 도윤에게서 좀 더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도윤이 어림없다는 듯 곧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서연은 바짝 다가온 도윤의 모습에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차마 도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초희가 앉아있던 자리에 놓인 가야금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에 띄게 긴장한 서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윤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러다 서연이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대도 초희의 현에 마음을 빼앗겼나 보구려. 실은 나도 처음 듣는 순간, 그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빠져 버렸다오."
얼마 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도윤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연은 여전히 초희의 가야금에 시선을 둔 채, 도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초희의 가야금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맑고 어여쁜 아이입니다. 온몸에서 내뿜고 있는 밝은 기운이 옆에 있는 사람까지 힘이 나게 합니다. 초희를 제게 보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대도 그러하였소. 봄날의 햇살처럼 한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그저 보고 있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아이였소."
도윤은 마치 눈앞에 어린 시절의 서연이 있기라도 한 듯 그리움이 잔뜩 묻어난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기억하시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당연히 기억하고 말고. 도윤을 처음 만났던 그날, 그 빼어난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를 보는 눈길은 무심하기만 했지만 서연은 용기 내어 도윤에게 먼저 다가갔다. 왠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곁을 주지 않을 것 같은 그 차가움을 뚫고서라도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어쩌면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미 그에게 끌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 마음은 지금까지 이어지고는 것이겠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덧없는 과거를 떠올리며, 서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소. 다시 돌아갈 수 있소. 그때처럼 그대가 다시 맘 편히 웃을 수 있게 내가 모든 것을 돌려놓을 참이오."
서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결의를 다지는 도윤을 바라보며,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하지 마십시오. 이미 다 지나간 일입니다. 이제 제게는 초희도 있고, 유모와 셋이 의지하며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리는 그저 나리를 위한 삶을 사십시오. 지금껏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 아니 과하고 넘칩니다."
"나를 위해 살라 하였소? 그렇다면 더더욱 그대와 함께 해야겠소. 어찌 그리도 모르시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두 눈 가득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는 도윤의 눈빛에 서연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전처럼 단호하게 그를 내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만을 바라보고 있는 도윤이었다. 한숨이 날 만큼 아름다웠던 용모는 세월이 흘러 누구보다 강인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저 하나쯤은 충분히 지켜주고도 남을 만큼 크고 단단해 보였다. 서연이 아무런 말이 없자 도윤이 다시 한번 강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그대와 함께 하는 것이오. 그러니,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지금 당장 내게 와 달라 하지는 않겠소. 나를 밀어내지만 마시오. 그대의 모든 것을 돌려놓은 뒤, 내가 그대에게로 가겠소. 그대는 그저… 그 자리에 있어만 주시오."
도윤의 앞날을 위해서는 그를 보내주어야 한다고만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차가운 말로 항상 도윤을 밀어내기만 했다. 그가 먼저 자신을 떠나 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서연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도윤의 옆에 있고 싶은 것이 자신의 본심이란 것을.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을 것만 같아 그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르고 있었단 것을…….
'내가 정말로 오라버니의 옆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진짜로 그리 해도 되는 것일까……?'
서연은 하마터면 그리 하겠다고 말할 뻔하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계속 이곳에 있다간 저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을 것만 같아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초희와 휘 오라버니가 너무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한 번 가 보아야겠습니다."
당황한 마음에 너무 다급히 움직인 걸까. 제 치맛자락을 밟고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서연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기울었다. 딱딱한 바닥과 충돌할 것을 예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은 서연은 충돌로 인한 아픔 대신 온몸에 전해지는 아늑한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서연의 두 눈에, 몸을 날려 자신을 받아낸 도윤이 아래에 깔린 채로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괜,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바닥에 부딪힌 충격이 제법 클 것 같았다. 도윤이 걱정된 서연은 그를 살피고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그대로 풀썩 도윤의 품에 안겨 들고 말았다. 도윤의 가슴에 얼굴이 닿자, 세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제야 바짝 밀착된 도윤의 몸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다급히 도윤에게서 벗어나고자 몸을 움직였으나, 그럴수록 도윤은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서연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당황한 서연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도윤을 내려다보니, 달빛에 비친 그림 같은 얼굴이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하오.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 듯하오……."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두 팔 아래 서연을 가둔 도윤이 망설임 없이 그대로 얼굴을 내렸다. 숨 막힐 만큼 뜨겁고 달콤한 느낌이 서연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서연은 제 입술에 겹쳐진 것이 도윤의 입술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흠칫 놀라 얼른 도윤을 밀어냈다. 하지만 곧 도윤이 서연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지 서연은 차마 도윤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니, 뿌리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에 달빛조차 가려지자 새까만 어둠만이 두 사람의 곁에 내려앉았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시 두 사람만이 세상에 남겨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서연은 끝없이 제게 다가오는 도윤의 뜨거운 숨결에 정신이 아늑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날이 밝으면 도윤을 밀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연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구름 사이로 다시 나타난 달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출 때까지 한참 동안 꿈결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