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깨고 나면 사라져 버릴 꿈은 아닌가 두렵기도 했지만 입술에 남아 있는 부드러운 감촉이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밟은 서연이 넘어지는 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던 도윤이었다. 서연이 다치지 않았음에 안도하던 것도 잠시, 제 품에 고스란히 안겨있는 보드라운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참고 있던 인내심이 툭하고 끊어져 버렸다. 머릿속으로는 이리도 참을성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면서도 서연에게로 향하는 움직임만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연의 입술과 맞닿게 되자, 자신에 대한 자책이나 허락을 구하지 않은 미안함도 모두 새하얗게 멀어져 갔다. 이 얼마나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이던가……? 분명 서연은 저를 밀어내지 않았다. 처음엔 놀란 듯 바르작거리던 몸이 곧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받아들여 주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서연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언젠가부터 서연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늘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던 서연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어하던 얼굴, 놀란 마음이 그대로 담긴 커다란 눈망울, 시선을 둘 곳을 몰라 당황하던 그 모습까지도…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루빨리 한용수의 행방을 찾아 스승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관직이 복권된다면 서연도 더 이상 제게 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평생을 가슴에 담고 있는 단 한 사람……. 그 사람의 마음이 드디어 제게로 온 것만 같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달무리 진 밤을 천천히 걷는 도윤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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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승원의 의원은 유시(酉時:17시~19시)가 다 되어 가서야 겨우 환자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승원의 훈훈한 인물까지 소문이 더해져 의원을 찾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보름에 한 번씩 날을 정해 가난한 백성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으니, 그런 날이면 의원은 그야말로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마지막 환자의 진료를 끝낸 뒤에야 한숨을 돌린 승원은 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뒤뜰로 나가 서연을 찾기 시작했다. 뒤뜰 한편에서 탕약을 달이고 있는 서연을 발견하자마자 승원의 얼굴에 곧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하루 종일 고단했던 몸이었지만, 서연을 본 순간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리 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승원이 서연을 돕기 위해 다가가자, 서연이 고개를 내저으며 승원을 만류했다.
"아닙니다. 하루종일 환자들을 돌보셨잖습니까? 거의 다 되어가니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잠시라도 쉬고 있으십시오.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시려고요?"
승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보는 서연의 모습에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 감정을 자각한 뒤로는 수시로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심장이었다. 명색이 의원이란 자가 제 심장 박동 하나 다스리지 못하다니……. 승원은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의원이라 하여 마음까지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승원은 서연이 시키는 대로 잠자코 앉아 쉬는 척하며, 슬그머니 서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연 아씨의 눈이 저리도 컸던가? 피부가 저렇게나 하얗다니……. 분홍빛 입술은 꽃보다 더 고운 빛깔을 띠고 있구나…….'
이제 승원의 눈에 비친 서연은 더 이상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영민하고 성실한 제자가 아니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운 여인일 뿐이었다.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정신없이 바쁜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제 감정을 서연에게 들켜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 달여진 탕약을 옮겨 담고 있는 서연을 눈으로 좇던 승원은 갑자기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린 서연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승원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으나 이미 늦어버린 듯했다. 열기로 홧홧해진 승원의 얼굴에 놀란 서연이 승원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과하게 반응한 것 같아 후회하던 찰나, 자신의 이마에 와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승원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나 뜨겁다니…….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서연의 모습에 승원은 그대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서연이 있었다. 진짜로 어디 몸이 아프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가까운 서연과의 거리 때문인지 승원은 온몸이 붕 떠있는 것만 같은 나른함을 느꼈다. 승원은 두 눈을 감고 이 꿈만 같은 시간이 끝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게요?"
누군가가 자신의 이마에 얹힌 서연의 손을 떼어냄과 동시에 승원도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승원의 눈앞에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도윤이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지난번 자신에게 치료를 받고 간 옥구현 현감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스승님의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합니다. 열이 나는 듯하여 살펴보고 있던 중입니다. 헌데 여기는 어쩐 일로……? "
잔뜩 날이 서있던 도윤의 얼굴이 서연의 말 한마디에 균열이 일었다. 승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는 서연의 모습에 다급히 손부터 떼 놓고 본 도윤이었다. 서연의 말에 승원을 다시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승원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승원의 몸에 서연이 닿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쪽은 옥구현 현감 김덕수요. 상처를 입어 일전에 최의원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옥구현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진료를 보려고 함께 오는 길이오. 최의원, 몸은 괜찮은 겐가?"
"과로하여 잠시 피곤했던 것뿐입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현감 나리, 내실로 들어오시겠습니까?"
승원은 도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덕수를 진료하기 위해 내실로 들어갔다. 몸이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서연이 걱정할 만큼 어디가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붉었던 얼굴도 지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승원은 서연을 도윤과 둘만 남겨두고 싶진 않았으나 의원으로서 환자를 돌보는 일이 우선이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덕수를 진료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까는 승원을 살펴보느라 경황이 없었던 서연은 승원과 덕수가 자리를 뜨고 나자 눈앞에 도윤이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지난번 도윤과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렇게 도윤을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자 했던 서연이었으나, 이리 도윤을 다시 보니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현감의 진료가 끝나고 나면 함께 돌아갑시다. 초희도 현감을 보면 무척 반가워할게요."
도윤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전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이렇게나 떨려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겠는데, 도윤은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걸까……? 서연은 자신만 그 일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어쩐지 스스로가 바보 같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리 최의원이 아픈 것 같아 그랬다고는 하나, 앞으로는 그렇게 최의원 몸에 손을 대고 그러지는 마시오. 나를 속이 좁은 사내라 욕해도 할 수 없소. 내가 보기보다… 투기가 많소."
얼굴은 그저 평온해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도윤의 양쪽 귀가 잘 익은 홍로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문득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과는 달리, 도윤은 수줍을 때면 귀가 붉어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잊지 마시오. 그대는 나의 여인이란 것을……. 이미 입맞춤까지 한 사이니, 이제 와서 발뺌할 생각은 마시오."
서연은 도윤의 입에서 나온 입맞춤이란 말에 화들짝 놀라 얼른 도윤의 입을 막았다.
'이 오라버니가 진짜!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도윤을 올려다보니, 도윤은 제 입술에 닿은 서연의 손길이 그저 기분 좋아 싱긋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서연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런 도윤의 모습이 밉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막 진료를 끝내고 내실에서 나오고 있던 승원과 덕수가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 자리에서 멈춰 섰다.
"큼큼, 우리 지평 나리 맘 속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이 어떤 분인가 했는데, 바로 저 아씨였군 그래. 참으로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로구만, 그렇지 않은가?"
승원은 덕수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연의 마음에도 도윤이 있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늘 도윤에게 선을 긋고 있던 서연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연은 연모하는 사내 앞에서 수줍어하는 여인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승원은 가슴 한편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문득 지난번에 아비가 했던 제안이 떠올랐다.
'무과에 급제하면 그 아이를 네 배필로 짝지어주마.'
자신이 무과에 급제해 관직을 얻으면 당당하게 서연에게 이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서연이 자신을 받아줄까……? 하지만 승원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무관이건 의원이건 그런 것은 서연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서연의 마음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었다. 승원은 가슴이 아팠지만, 도윤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서연의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의 옆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저 서연이 지금처럼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도윤은 승원이 서연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여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내의 본능 같은 감각이었다. 도윤과 승원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마주한 두 사람의 눈빛에서 번쩍 불길이 일었다. 도윤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승원은 조금이라도 이 여인을 힘들게 하면 그때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좀 전까지 달여지던 탕약의 씁쓸한 향이 아직 뒤뜰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는 도윤과 승원의 얼굴은 마치 쓰디쓴 탕약을 다 마시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한쪽에선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눈싸움을 알 길 없는 서연과 덕수가 초희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하하 호호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분위기가 의원 안을 덮고 있는 가운데, 도윤과 승원의 신경전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