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나리! 정말로 현감 나리십니까?"
초희는 앞마당으로 들어서는 도윤과 서연을 반갑게 맞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곤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제게 잘해주던 옥구현 사람들을 한 번씩 떠올리곤 했으나, 그곳 사람을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초희였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한양물이 좋긴 좋은가 보구나, 이리 얼굴이 훤한 걸 보니."
덕수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초희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 초희의 얼굴은 더없이 밝고 생기가 가득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초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초희는 눈앞에 덕수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영주댁이 내어온 식혜로 목을 축이는 덕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반가운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현감 나리,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다른 분들도 다들 잘 계시지요? 아, 이맘때면 숙향 언니가 늘 고뿔에 걸려 고생하곤 했는데, 올해는 괜찮습니까? 후훗, 이방 나리도 여전하신가요? "
초희는 저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며 덕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터에, 덕수의 얼굴을 보게 되니 다른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물 밀듯이 밀려왔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덕수는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할지를 몰라 곤혹스럽기만 했다. 초희가 언급한 사람들은 불행히도 살아남은 쪽이 아니었던 것이다.
초희는 갑자기 급격히 낯빛이 어두워지는 덕수의 얼굴에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러고 보니 덕수의 얼굴 한쪽에 아물어 가는 상처가 보이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옥구현 현감인 덕수가 특별한 일 없이 한양으로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옥구현에 산적 떼가 습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변고를 당했단다. 현감이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네가 안부를 물은 이들이 무사하지 못한 듯하구나……."
덕수를 대신해 도윤이 옥구현 소식을 전해 주었다.
좀 전까지 덕수를 만난 반가움에 들떠 있던 초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도윤 또한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옥구현 규찰을 나갔을 때 도윤이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무척 순박하고 정이 많은 이들이었다. 사리사욕에 밝은 도성 사람들에 비하면 한없이 순수하기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옥구현 백성들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영상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미안하구나……. 내가 부족하여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단다……."
눈물이 차오르는 초희의 눈을 보며 덕수가 고개를 숙였다. 쑥대밭이 되어 버린 옥구현 관아는 시간이 흐르면 원래대로 정비할 수 있겠지만, 죽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현감 나리라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방 나리도, 숙향 언니도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모두 좋은 분들이셨으니까요……."
덕수는 자신을 위로해 주는 초희의 어른스러운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리 영상의 흉계라고는 해도, 현감으로서 관아 사람들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안고 있던 덕수였다. 덕수는 서연에게 안겨 흐느끼는 초희를 보며, 반드시 영상의 죄를 밝혀 억울하게 희생된 옥구현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한바탕 울음을 터트린 뒤 마음을 가라앉힌 초희는 죽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듯 애잔한 가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다시 듣고 싶었던 초희의 현이었건만, 그게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곡이 될 줄이야……. 덕수는 마음 한편이 착잡했지만, 초희의 연주에는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도 함께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애상에 젖는 것은 딱 초희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만이다. 옥구현에 돌아가면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관아를 재정비하는데 온 힘을 쏟으리라…….'
도윤이 그런 덕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곁에서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믿음직스러운 그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한결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분명 나이는 저보다 아래이거늘, 이 사내는 어찌 이리 크고 단단해 보이는 것일까……?
"지평 나리, 제게 분부하실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연통해 주십시오."
"우선은 고을로 돌아가 관아를 재정비하는데 힘을 쏟게. 상감마마께서도 산적 떼에게 희생된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특별히 옥구현에 신경을 쓰고 있으시다 들었네."
"예, 나리. 그러잖아도 초희 얼굴만 보고 바로 길을 떠날 참이었습니다. 다들 목이 빠져라 제가 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게 되면 즉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서연은 집에서 키우고 있는 약초들 중 기력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담아 꾸린 보퉁이를 덕수에게 건네주었다. 승원의 의원에서 처음 본 사이였지만, 초희에게 얘기를 많이 들어온 터라 덕수가 남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초희에게 그렇게 잘해 주었던 이라 하니, 서연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씨, 초희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지평 나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씨와 함께 있을 때의 나리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 같습니다. 이리도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두 분…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나중에 혼례를 올리시게 되면 저도 꼭 불러주십시오. 열 일 제쳐 놓고 달려와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혼례라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덕수의 말에 당황한 서연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 것이 아니라니, 우리는 이미 입맞……."
도윤의 입에서 또 입맞춤이란 말이 나오려고 하자, 서연은 아연실색하며 도윤의 입을 막고는 서둘러 덕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현감 나리, 살펴가십시오. 초희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한양에 오실 일이 있거든 언제든 편하게 들러 주십시오."
"현감 나리,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고 나리 몸부터 챙기십시오. 나리가 강건하셔야 남아 있는 분들도 힘이 날 겁니다. 초희는 한양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덕수는 자신을 배웅해 주는 세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한 뒤, 길을 나섰다. 덕수의 뒤로 건장한 체격을 지닌 호위 무사들이 뒤따랐다. 도윤의 청으로 임금이 덕수를 위해 특별히 보내준 무사들이었다. 덕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초희도 도윤에게 인사를 한 뒤 먼저 자리를 떴다.
"옥구현 관아를 습격한 게, 산적 떼들의 소행이… 아닌 게지요?"
도윤과 둘만 남게 된 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아직 자세한 것은 말해줄 수 없지만, 다른 일들이 엮여 있는 것은 사실이오."
서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조심하십시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서연은 애써 감정을 누른 채 짧은 한 마디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다.
"그리하겠소. 허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말하리다."
서연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쩌면 자신의 아비와 관련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집안 때문에 도윤이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서연의 마음을 헤아린 도윤이 서연과 눈을 맞춘 뒤,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비단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는 일이 아니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오. 이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위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스승님을 위해……. 그리고, 그대와 나를 위해…….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주시오."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도윤의 모습이 마치 바위처럼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는 늘 그런 사내였다. 결코 가볍게 입을 떼지 않았고, 자신이 내뱉은 말은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의(大義)가 아니라면 따르지 않았고, 정도(正道)가 아니라면 가지 않았다. 서연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내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었다.
"무사하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누구 명인데 내 가볍게 여기겠소? 조심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털끝 하나라도 다치지 마십시오. 도포 자락 하나라도 상해 오셔서는 안 됩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연은 부러 잔소리를 해댔다. 도윤은 그런 서연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치시면, 그땐……."
도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연의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서연을 꼭 껴안은 채로 서연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절대로 다치지 않겠소. 무사히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정식으로 그대에게 청혼하리다……."
서편 너머로 뉘엿뉘엿 떨어지는 해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옅은 분홍빛과 주홍빛을 잘 섞은 듯한 고운 빛깔이 하늘을 채색하기 시작했다. 서연의 얼굴에도 저녁놀이 어린 듯 수줍은 붉은빛이 번졌다. 점점 짙어져 가는 그 선홍빛처럼, 온 힘을 다해 용기를 내기 시작한 마음도 점점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