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잎새 Nov 15. 2024

43장. 휘의 투기

 업무를 마치고 막 사헌부 관청을 빠져나오던 휘는 낯익은 누군가의 얼굴을 발견하곤 반색을 표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겐가?"

 휘는 제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진운을 보며 환한 웃음을 드러냈다. 진운이 어쩐 일인지 혜인도 없이 혼자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정언 나리, 이제 퇴청하시는 길이십니까? 혹 이후로 다른 용무가 있으십니까?"

 "아닐세. 요 며칠 일이 너무 바빴던 터라 오늘은 모처럼 일찍 돌아가 좀 쉬려던 참이네.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휘는 혹시나 혜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기대감에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혜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실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휘를 보며 진운이 나직이 입을 뗐다.

 "지금 집에 호조의 문좌랑 나리가 와 계십니다."

 "수원이? 예판 대감은 아직 퇴청하시지 않은 걸로 아는데, 대감을 뵈려거든 예조로 갈 일이지 어찌 그가 대감의 사가를 찾아왔단 말인가?"

 "대감마님이 아니라 아씨를 찾아오셨습니다. 지난번 주막에서 만났던 도령이 아씨인 걸 알고 오신 듯합니다."

 휘는 주막에서 호조의 좌랑인 벗들이 혜인에게 호의를 보이던 것이 생각나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좌랑이 찾아왔다 한들 혜인 낭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를 반길 리가 있겠는가?"

 "그게… 좌랑 나리께서 활쏘기를 가르쳐주신다는 말에 아씨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두 분이 함께 활터로 가셨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희 아씨가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 분이신지……. 두 분이 아주 얘기가 잘 통하시는 게, 제 눈에도 퍽 잘 어울려 보이셨습니다."

 여유롭기만 했던 휘의 얼굴이 진운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나를 활터로 안내해 주게."

 휘는 좀 전까지의 피로감은 온데간데없이 진운과 함께 혜인이 있다는 석호정 활터를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휘를 보며 진운이 무언가를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언 나리… 외람된 말씀이긴 하오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수원과 함께 있을 혜인의 모습에 온 신경이 쏠려 옆에 진운이 있단 사실도 잊고 있었던 휘였다.

 "편히 말해보게."

 "소인의 눈에는 분명 나리께서 저희 아씨를 마음에 두고 있으신 것 같은데, 어찌하여 아씨께 확실한 표현을 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혼약을 사실로 해도 될 것을 왜 그런 척만 하기로 하신 것인지……. 제 물음이 주제넘었다면 송구합니다."

 진운은 요사이 부쩍 의기소침해진 혜인을 그냥 두고 보기가 힘이 들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 연유가 눈앞에 있는 이 잘생긴 사내 때문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거짓으로 정인임을 연기할 필요가 무어 있단 말인가? 휘는 예상치 못한 진운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엷은 웃음을 띠었다.

 "조만간 예판 대감이 자네를 양자로 들일 것이라고 들었네. 곧 누이가 될 이를 걱정하는 마음이야 당연할 터, 어찌 그 마음을 내 주제넘다 탓하겠는가?"

 휘는 진운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도 활터로 향하는 발걸음만은 늦추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체력이 좋아 빠른 걸음에도 전혀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나는 원래 지금 하고 있는 일만 마무리 짓고 나면, 청국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혼인을 하고 나면, 내 안사람은 독수공방 하며 기약도 없이 나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휘는 도윤 외에는 부모에게조차 내비친 적이 없는 자신의 속뜻을 어쩐 일인지 진운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늘 혜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키고 있는 진운이 얼마나 그녀를 위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진운에게는 솔직한 마음을 얘기해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혜인에게 털어놓고 싶은 자신의 본심을 진운에게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혜인에게 끌리면서도 주저하고 있는 연유를…….

 "내 부인이 될 여인에게 그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네. 그래서, 혼인에 대해서 여태껏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나란 사람은 이리도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런 나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네."

 진운은 휘의 대답을 듣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여인들과의 자유분방한 만남을 즐기고 싶어 혼인을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인을 해놓고 저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내들이 부지기수이거늘, 이 사내는 혹여나 자신으로 인해 부인이 힘들어질까 봐 혼인자체에 대해 신중한 것이었다. 석호정 활터 앞에 이르자, 진운이 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부탁을 해왔다.

 "아씨께 나리의 진심을 말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씨는 다른 오해를 하실 것입니다. 나리의 생각을 다 듣고 난 뒤 어떻게 할지는 오롯이 저희 아씨의 몫입니다. 아씨에게 마음이 없어 혼인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마음을 솔직히 보여주십시오……. 제 주제넘은 참견은 여기까지입니다. "

 휘는 진운의 마지막 말에 어딘가 한 방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혜인에게 끌리면서도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은 채 혜인을 헷갈리게만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못난 사내란 말인가? 진운의 말대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난 뒤 어떻게 할지는 혜인 스스로가 정할 일이었다.

 "고맙네… 헌데 자네는 아무래도 내 편인가 보군그래. 낭자가 다른 사내와 있단 사실을 부러 내게 알려주러 온 걸 보면 말일세."

 휘는 진운이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흡족하기만 했다.

 '그것은 아씨의 마음에 있는 것이 나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리의 뜻을 알고 나니 더더욱 나리의 편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보통의 규방 규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저희 아씨를 이해하고 존중해 줄 이는 나리밖에 없습니다. 부디… 아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진운은 속에 있는 말을 삼긴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휘는 그런 진운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한 뒤, 혜인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휘의 눈에 활시위를 당기려는 혜인을 뒤에서 붙잡아 주고 있는 수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진운의 말대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평상시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이, 휘의 눈에 화르륵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낯선 감정이 휘의 가슴속에 솟구쳤다.

 혜인이 쏜 화살은 수원의 도움으로 시위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얼마 못 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아쉬운 눈빛으로 보고 있던 혜인은 별안간 제 앞에 나타난 휘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나리께서 여긴 어떻게……."

 오늘도 여전히 수려한 휘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하지만 혜인은 요사이 휘로 인해 얼마나 심란했던지를 생각해 내곤 애써 얼굴에서 반가운 기색을 지워냈다.

 "그러는 낭자야말로 어찌 정인인 나를 두고 다른 사내에게 활쏘기를 배우고 있는 것이오?"

 휘의 입에서 나온 정인이란 말에 혜인뿐만 아니라 수원 또한 깜짝 놀라 휘를 쳐다보았다.

 "아니, 김정언,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겐가? 혜인 낭자가 자네의 정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네. 그러니 혹여나 낭자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안 됐지만 그 마음은 접게. 낭자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네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

 혜인은 갑자기 나타난 휘가 자신과 정인임을 선언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제 아비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시간을 벌고자 한 연기이거늘, 이리 다른 사람 앞에서 공언(公言)을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게다가 지금 휘의 모습은 진짜로 정인이 다른 사내와 있는 모습을 투기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휘의 의중을 알 리 없는 혜인은 휘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리 행동하니 휘에 대한 제 마음이 자꾸 커지는 게 아닌가? 수원은 혜인이 아무런 말이 없자, 두 사람이 정인 사이란 것을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이대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자네가 정말로 혜인 낭자의 정인이라 해도, 두 사람이 혼인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직 내게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다고 생각하네만."

 휘는 자신의 말에 아무런 동조를 해주지 않는 혜인을 보며, 혜인이 정말로 수원에게 마음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휘는 수원을 돌려보내기 위해 내기를 제안했다.

 "자네가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 나와 활쏘기 시합을 하도록 하세. 이긴 쪽이 낭자에게 활쏘기를 가르쳐 주는 걸로 하지. 어떤가?"

 수원은 휘의 번듯한 차림새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평소 휘가 몸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수원이었다. 활쏘기라면 제법 자신이 있던 지라 가볍게 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기곤 수락의 뜻을 내비쳤다.

 "좋네. 자네가 지면 두 말하지 않고 돌아가도록 하게."

 "피차일반일세. 자네야말로 진즉에 돌아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나 말게."

이전 12화 42장. 깊어지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