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은 느닷없이 펼쳐진 두 사내의 활쏘기 시합이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수원이 자신을 찾아와 담소를 나눌 것을 청해왔다. 지난번 주막에서 본 적이 있는 데다, 정중하고 사려 깊은 수원의 태도에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대화가 잘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사례(大射禮)에 대한 일이 화제에 올랐고, 수원이 활쏘기를 가르쳐주겠단 말에 의기투합해 함께 활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평상시 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가 활을 잘 쏠 것이라곤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혜인은 휘가 괜히 망신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말았다. 혜인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휘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활과 화살을 정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총 열 발을 쏘기로 하고, 수원이 먼저 활시위를 당겼다. 수원이 쏜 첫 번째 화살이 시원스럽게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정중앙에 꽂히는 화살을 보며, 수원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휘를 돌아보았다.
'보았는가, 김정언?'
휘는 만면에 화색을 띠고 있는 수원의 모습에도 일절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 여느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수원은 예상과 달리 활을 쏘는 휘의 자세가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보곤 흠칫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수원이 쏘았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날아가 정확하게 과녁에 꽂혔다.
'김정언이 저렇게 활을 잘 쏘았던가? 내 일찍이 그가 활쏘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수원은 슬슬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두 번째 화살을 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수원이 쏜 화살은 이번에도 정확히 목표로 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명중하는 화살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원은 좀 전엔 휘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휘의 두 번째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본 순간, 수원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리 보아도 휘의 자세는 완벽한 궁사 그 자체였던 것이다.
혜인은 휘가 쏜 화살이 연이어 과녁을 명중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상시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하게 활을 당기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심적으로 부담을 느낀 수원은 세 번째 화살을 쏠 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심 휘의 화살도 과녁을 벗어나길 바랐지만 수원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에도 휘의 화살은 정확히 정중앙에 꽂혔다. 결국 열 발 모두를 명중시킨 휘가 일곱 발을 명중시킨 수원을 이겼다. 휘의 마지막 화살이 과녁에 꽂힌 아홉 번째 화살을 꿰뚫는 순간, 수원은 명백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인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되려 휘만 돋보이게 해 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수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활쏘기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혜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오롯이 휘만을 쫓고 있었단 사실을......
얼마 전에 윤수가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을 포기했단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윤수를 만나 함께 막걸리라도 마시며 실연의 상처를 달래야 할 것 같았다. 약속대로 수원이 깨끗이 물러나고 난 뒤 둘만 남게 되자, 휘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혜인에게 다가왔다.
"자, 그럼 훼방꾼도 없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낭자에게 활쏘기를 가르쳐 주겠소. 활쏘기 말고 다른 것도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시오."
"대체 활쏘기는 언제 배우신 겁니까? 그렇게 활을 잘 쏘실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윤이 딱 하나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활쏘기라오. 내 활쏘기라면 웬만한 무관들보다 잘할 자신이 있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선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휘의 얼굴이 얄미울 정도로 잘생겨 보였다. 이제 자신의 눈에는 이 사내가 무얼 하건 빛나 보일게 분명했다.
"대체 어쩌시려고 문좌랑 나리 앞에서 정인이란 소릴 하신 겁니까? 나리와 저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제 혼삿길을 망치실 일 있습니까?"
혜인은 자꾸만 제 마음을 휘젓는 휘가 야속해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하고 말았다.
"낭자는 진정 나와 연기로만 정인이 되고 싶은 게요?"
설마 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일까? 혜인은 자신을 떠보는 듯한 휘의 말에 흠칫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연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소만……."
혜인은 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연기로만 정인 사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정인 사이를 연기하고 싶지가 않다는 것인지……. 하지만, 곧 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정인도 아닌데 자신의 아비 앞에서 그런 척 행동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바람처럼 떠도는 자유분방한 사내가 한 여인에게만 매여 있으려 할 리가 없었다. 사실 지금껏 휘가 자신을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아 그동안 나리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앞으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더 이상은 거짓 연기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휘는 상처받은 듯한 혜인의 표정을 보고선 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혜인이 더 큰 오해를 하기 전에 서둘러 제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아, 돌아서려는 혜인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혜인은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연기가 아니라 그대와 진짜로 정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오. 너무 늦게 내 마음을 고백해서 미안하오……."
혜인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와 정인이 되고 싶다고 하였소."
"어, 어째서 갑자기… 그동안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건 저와 혼례를 치르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소. 말로만 하지 않았을 뿐,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부터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소. 그대에게 자꾸 마음이 가면서도 다른 이유로 망설이고 있었던 게요."
혜인은 휘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이었단 사실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자신만 그를 연모하고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자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망설였던 이유가 뭔지 몰라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혹… 그 망설였던 이유란 게 잊지 못하는 옛 정인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혜인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진즉에 혜인과 진짜 정인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누군가를 연모해 보기는 그대가 처음이오. 그러니 옛 정인 같은 건 있지도 않소."
휘의 말에 혜인의 두 볼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부끄럽긴 해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를 만큼 듣기 좋은 말이었다.
"실은… 내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있소. 그 일만 마무리 짓고 나면, 청국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소.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경험을 하고 오는 것은 내 오랜 염원이었소. 언제 돌아올지 몰라 혼인을 하는 것을 망설였던 게요."
생각지도 못했던 휘의 말에 혜인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동안 휘가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고 싶어 혼인을 하지 않는다 오해했던 것이 미안하기만 했다.
"그대만 허락해 준다면, 내 청국으로 가기는 가되, 일 년 안에 반드시 돌아오겠소. 기약 없는 유학길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보고 돌아오리다. 만약 그대가 그것도 싫다면… 내 청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겠소. 이젠 그대와 혼인하는 것이 내 오랜 염원보다 훨씬 중요하오."
"사내대장부가 한 번 뜻을 품었으면 제대로 그 뜻을 펼쳐야지요. 가십시오, 청국으로."
"그러면… 그 기간 동안 나를 기다려주겠단 게요?"
"고작 일 년으로 무얼 제대로 보고 오겠습니까? 가서 원하는 만큼 있다가 오십시오."
"낭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나와 떨어져 있어도 괜찮은 게요?"
청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면서 정작 혜인이 있고 싶은 만큼 있다 오라고 말을 하자, 괜한 서운함이 밀려오는 휘였다.
"떨어지긴 누가 떨어집니까? 저도 함께 갈 것입니다. 혼례를 올리고 나리와 함께 청국으로 가겠습니다."
휘는 생각지도 못한 혜인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 나와 함께 청국에 가겠단 말이오?"
"예, 안될 건 또 무어랍니까?"
"......"
휘는 잠시 말문이 막히긴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곧 혜인의 생각이 그 무엇보다 적절한 해결책임을 깨달았다. 자신은 오랜 염원대로 청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고, 혜인 또한 갑갑한 굴레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 연모하는 두 사람이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다 하였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제 예상을 벗어나는 여인이었다. 그 모습이 늘 신선하고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그래서 그런 혜인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한번 혜인을 힘주어 껴안았다.
"좋소, 함께 갑시다. 어디를 가든 절대로 그대를 두고 가지 않겠소. 평생 내 곁에 있어 주시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휘와 혜인은, 진짜로 정인이 되어 두 손을 맞잡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루빨리 혼례를 올리기로 약조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로 다가갔다. 휘의 담홍색 도포와 혜인의 연분홍치마가 한데 어우러져 조화로운 빛깔을 자아냈다. 이제 막 시작된 선남선녀의 연정만큼 곱디고운 빛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