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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Nov 20. 2024

45장. 영환의 간계

 "영상대감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인경이 울린 지도 한참이 지난 야심한 시각, 의금부 옥사를 지키고 있던 옥졸들은 영의정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아한 눈빛으로 영환을 주시했다.

 "영상 대감께 길을 내어드려라. 곧 있을 추국에 앞서 대감께서 죄인에게 잠시 물을 것이 있다 하신다."

 옥졸들은 영환의 뒤에 서 있던 의금부 도사의 얼굴을 본 뒤에도 우물쭈물 서로의 눈치만 보며 길을 터주기를 망설였다.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비키지 않고!"

 상관인 제 명에도 옥졸들이 선뜻 비껴서지 않자, 의금부 도사 박선우는 노기 어린 음성으로 옥졸들에게 호통을 쳤다.

 "하, 하오나, 아무리 영상 대감이라 하여도 사사로이 옥 안에 드나들 수는 없습니다……."

 겨우 용기를 낸 옥졸 하나가 비록 떨리는 목소리긴 지만, 상관의 명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옆에 있던 다른 옥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료의 뜻에 동조했다. 옥졸들이 제 명을 따르지 않자, 영환의 앞에서 면목이 없어진 선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듯한 선우의 모습에 옥졸들은 후환이 두려웠으나, 그렇다고 규율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느긋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환이 선우에게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선우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 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늦은 시각까지 옥사를 지키느라 노고가 많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보초를 서야 하니, 그게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서슬 퍼런 상관의 호통에 주눅이 들어 있던 옥졸들은 영환의 말에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영의정 대감이 저희 같은 아랫것들을 위해 주는 듯한 말을 하자, 괜시리 기분이 으쓱해지는 것이었다. 영환은 옥졸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은밀히 손 안에 은자를 쥐어 주었다. 옥졸들은 제 손에 쥐어진 은자의 갯수를 확인하곤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추국에 앞서 잠시 죄인에게 확인할 것이 있네. 일각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니, 자네들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 둘만 입을 다문다면, 오늘 일을 누가 알겠는가?"

 두 옥졸은 영환의 말에 갈등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쩍거리는 은자의 유혹은 차마 물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나라의 정승이 죄인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겠는가? 일각 정도만 규율을 어기면, 제법 번듯한 기와집 한 채 살 수 있을 만한 은자가 손에 들어온다는 데, 그보다 더한 일도 못할까 싶었다. 두 옥졸은 결심이 선 듯,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 서서 영환에게 길을 터주었다. 영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옥사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환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는 자신도 영환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긴 했지만, 새삼 영환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매수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곤 혀를 내둘렀다. 영환이 맘만 먹으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일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할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선우의 목을 죄어왔다.



 **



 "쯧쯧, 꼴이 말이 아니군그래. 내가 주는 재물이 결코 부족하진 않았을 텐데, 기어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다 사헌부 규찰에 적발되어야만 했는가?"

 목에 찬 칼의 무게가 버거울 만큼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정무는 제 귀에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는 순간, 좀 전까지 다 죽어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쇠창살에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대, 대감! 제 아들은, 상민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대감이 분부하신 대로 저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들놈만 살려 주신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제 입에서 대감과 관련된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옥 안에 갇혀 있는 탓에, 제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는 정무는 필사적으로 영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영환은 그런 정무를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지금이야 정무의 귀에 아들의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지만, 시일이 지나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나중에라도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정무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정무의 입을 확실히 닫게 하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자네 아들의 행방을 찾았네. 아무도 찾을 수 없을 만한 곳에 안전하게 숨겨뒀으니 안심하게."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흐흑. 아들 놈만 무사하다면 이 늙은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부디 상민이를 지켜주십시오, 대감"

 "그 말 진심인가? 자네 아들만 무사하다면 자네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그 말, 말일세."

 "예. 이미 살만큼 산 목숨입니다. 느지막이 생긴 자식이라 제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영환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정무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자네 아들을 찾은 것을 천운으로 알게. 만약 사헌부 관원에게 먼저 발각되었다면, 내 명을 받고 무슨 일을 해오고 있었는지를 다 털어놓았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내 어찌 자네 아들을 살려둘 수 있겠는가? 안 그런가, 껄껄껄."

 영환은 거짓을 말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투 또한 자연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정무는 영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영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 그럼 내가 자네 아들을 살려주기로 했으니, 자네도 내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감께서 제게 시키신 일들은 죽을 때까지 함구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나는 말일세……. 뭐든 확실한 걸 좋아한다네.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것이 바로 인간의 세 치 혀라네. 지금까지야 아들을 위해 자네가 입을 닫고 있었다지만, 자네 아들이 멀리 도망가 무사히 지내게 된다면 자네 마음이 바뀔지 어떻게 알겠나?"

 "그럴 리 없습니다, 대감! 믿어주십시오!"

 "내가 자네 때문에 불안해지면, 자네 아들을 살려준 것마저 후회할 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 성정을? 조급증이 일면, 내가 얼마나 흉폭해지는 지를 말일세……."

 정무는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영환의 얼굴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왔다.

 "제, 제가 어떻게 하면 대감께서 안심하실지……."

 "아까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 아들만 무사하다면, 자네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자네가 살아있는 한, 언제 입을 열지 모르니 어디 내가 맘 편히 지낼 수나 있겠는가?"

 "......"

 정무는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 영환의 말에 놀란 듯 잠시 말이 없었으나, 이내 결심을 굳히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환의 뜻을 거스른다면 아들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제 죽음으로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감……. 약조는 꼭 지켜주십시오……."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는 말게. 애초에 자네가 이 사달을 만든 것 아닌가? 내 생각 같아선 자네 집안 씨를 말려버리고 싶으나, 옛 정을 봐서 자네 아들이라도 살려주는 것이니 그리 알게."

 영환은 비통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는 정무를 뒤로 하곤 천천히 옥사를 빠져나왔다. 약속대로 일각 정도가 지나자마자 옥사에서 나오는 영환의 모습에 안심한 옥졸들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살펴가십시오, 대감."

 영환은 훗날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제게 굽신대는 옥졸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속내를 숨긴 영환의 얼굴에는 사람 좋은 푸근한 웃음만이 서려있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노고를 치하 하기라도 하는 양 어깨를 여러 번 두드려주니, 옥졸들은 그저 감격한 표정으로 저를 배웅하기 바빴다. 의금부 대문을 나서는 영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 이제 어쩔 텐가, 이지평? 자네가 아무리 날뛰어봐야,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하네.'

 정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면 그 사실을 알게 된 도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생각하자, 절로 영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잘생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퍽 즐거울 것 같았다.

 "하하하!"

 순라군이 순시를 다니는 길을 훤히 꿰고 있는 수하의 안내에 따라, 거침없이 도성 안을 활보하는 영환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펴졌다. 세상 두려울 것이 없는 자의 교만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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