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원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보름에 한 번씩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해주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의원(醫院) 안은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제까지는 서연과 둘이서 그럭저럭 환자들을 감당해 왔으나, 더 이상은 두 사람의 힘만으론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은 바쁜 일손을 돕기 위해, 특별히 초희가 서연을 따라나선 참이었다. 초희는 서연과 함께 의원에 간다는 사실에 아침부터 잔뜩 들떠 있는 중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서연이 의술을 배우고 있다는 곳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데다, 자신이 서연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던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힘차게 발을 내딛는 초희를 바라보며 서연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집안이 망한 뒤로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떻게든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해보지 않았는데, 천진한 초희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혜인을 알게 되고, 초희 같은 동생이 생긴 데다 도윤과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기까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이렇게까지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서연은 문득 도윤이 퇴청하는 대로 곧 의원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도윤을 생각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가슴이 떨려 죽겠는데, 그동안은 어떻게 도윤을 냉대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제 연정 같은 건 꼭꼭 숨겨둘 수 있었겠지……. 하지만 한 번 밖으로 나오고 나니, 이제는 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것이었다.
서연은 여전히 자신이 도윤의 옆에 있는 것이 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잃는 것이 도윤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라는 휘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윤이 가장 원하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서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그가 없는 세상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서연은 앞으로는 도윤이 주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그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리라 결심했다,
"언니, 이곳입니까?"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서연은 옆에서 들려오는 초희의 낭랑한 음성에 얼른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의원 앞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서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저를 쳐다보고 있는 초희에게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초희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승원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아씨가 바로 초희 아씨로군요. 어서 오십시오."
초희는 자신을 아씨라 칭하는 눈앞의 사내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지평 나리도, 정언 나리도 절로 가슴이 설렐 만큼 지나치게 잘생긴 사내들이었다. 두 사람을 처음 본 순간, 현실감 없는 외모 때문에 얼마나 놀랐던가?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내의 수려함은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당기는 편안함이 있었다. 초희는 옥구현 관아의 기녀들이 곧잘 보던 염정 소설이 떠올랐다. 거기에 쓰여 있던 두근거림이 무엇인지를 오늘 처음 알 게 된 것이었다.
화르륵……. 가까이 다가선 승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초희의 얼굴이 불타오를 것처럼 달아올랐다. 초희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숙이곤 조그마한 목소리로 승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문초희라고 합니다. 언니께 의원 나리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많이 닮으셨습니다. 친자매라 하여도 믿을 것 같습니다."
서연과 닮았다는 승원의 말에, 초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서연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난데, 자신이 그런 서연과 닮았다니……. 초희는 승원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자꾸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 연유가 두 사람을 돕기 위한 것임을 깨달은 초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가 지금 염정 소설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 저는 무얼 하면 될까요?"
초희는 두 팔을 걷어붙이며,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서연은 그런 초희의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승원은 유독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초희에게도 여지없이 그 매력이 통한 모양이었다.
"서연아, 나도 왔단다."
세 사람이 막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찰나, 평상시의 고운 복식과는 달리 수수한 차림새를 한 혜인이 진운과 함께 의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작정하고 서연을 도우러 온 모양새였다. 혜인은 전부터 자신도 서연을 돕고 싶다고 벼르고 있던 차였다. 반가의 규수로 고생 한 번 한 적이 없을 게 분명한 혜인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서연은 혜인의 그런 마음이 고맙기만 했다. 서연은 반갑게 혜인을 맞으며 초희를 혜인에게 소개해 주었다. 혜인은 초희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초희를 꼭 껴안았다.
"네가 초희로구나! 어쩜 이리 어여쁠꼬? 서연이에게 하는 것처럼 나도 언니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초희는 혜인의 품에 안긴 채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처음 만난 저를 이리 격하게 환영해 주다니……. 듣던 대로 무척 호방한 성품을 지닌 여인인 듯했다. 하지만 초희도 혜인의 환대가 싫지 않았다. 저를 안아주는 따뜻한 품이 너무 포근해서, 저도 모르게 혜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에 올라오고 난 뒤 어찌 이리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 것인지……. 초희는 또 한 번, 자신을 한양으로 데려온 도윤에게 깊이 감사했다.
혜인과 초희가 인사를 나눈 뒤로는 몰려들기 시작하는 환자들로 인해 세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무료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침을 맞기 위해 오는 이들이었다. 약재를 무료로 받는 것은 어쩐지 미안하다고 느끼는지 대부분이 침을 맞는 것을 선호했다. 가난하다고 하여 염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며, 내 것이 아닌 것을 무작정 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 직접 캔 나물을 가져오거나 감자나 고구마 한 개라도 주고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혜인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제 어미가 침을 맞고 난 뒤 일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승원에게 쪼르르 달려가 무언가를 내미는 것을 보았다. 승원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자그마한 개떡 한 조각이었다. 아마 아이가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 귀중한 양식이었을 것이었다. 승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이에게 고맙다 말한 뒤 그 자리에서 바로 개떡을 입에 넣어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때 묻은 보자기에 싸인 제 초라한 선물을 의원 나리가 좋아해 줄지 걱정스러웠던 아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제 어미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혜인의 가슴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고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 것이었다.
집안이 망하기 전에는 자신처럼 곱게만 자랐을 서연이,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분명 고생스럽긴 하지만 너무도 크고 가치 있는 일들이었다. 혜인은 비슷한 집안의 여식이란 이유로 어울려오던 제 주변의 규수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서책을 읽기는커녕 제 치장에만 관심이 있고, 좋은 가문의 사내와 혼인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새삼 자신이 서연과 다시 만나 벗이 된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이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귀중한 경험을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가난한 백성들의 삶에 대한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갔을 테니…….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서연은 혜인과 눈이 마주쳤다가, 자신을 향한 혜인의 뜨거운 눈빛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제게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하는 혜인이었지만, 지금의 눈빛은 무언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연유야 알 수 없었지만, 저를 보는 혜인의 시선에 서연도 두 눈을 마주한 채 고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한 몸으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서서 저를 돕고 있는 혜인을 향한 고마움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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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의원 밖에선, 서로를 향해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두 여인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눈 하나가 있었다. 패랭이를 깊게 눌러쓴 채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한 사내는 두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서연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동안 서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사내의 눈빛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