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 나리, 감찰 업무를 모두 마치고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대장청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도윤은 현규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현규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게. 그간 고생 많았네."
도윤은 오랜만에 만난 현규의 얼굴을 잠시 훑어보았다. 다행히 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햇빛에 조금 그을린 모습이 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서구(傳書鳩)를 통해 목적한 바를 달성했다는 짧은 보고는 이미 받은 터였다. 하지만 자세한 일은 사헌부로 복귀해 직접 아뢰겠다고 전해온 현규의 뜻에 따라, 도윤은 현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린 뒤, 한껏 목소리를 낮춘 현규가 옥구현에서의 일을 고하기 시작했다.
"지평 나리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옥구현 전(前) 현감이 축적한 재물들은 영상 대감이 사주한 일을 해준 대가로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역시나 그랬군……. 지난번 궐에서 마주쳤을 때, 영상 대감이 옥구현에 대해 잘 아는 눈치였네. 영상 대감이 사주한 일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던가?"
현규는 도윤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겨우 알아들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현규의 말을 듣고 있던 도윤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영상 대감이 한용수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니!"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언 육 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정에서는 한용수를 쫓기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나 결국에는 그의 행방을 찾지 못했고, 그 사건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자신이야 스승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한용수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지만, 영상이 어찌해서 세상에서 잊힌 사건의 증인을 찾으려 한단 말인가? 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영상이 한용수를 찾으려는 까닭……. 분명 자신과 같은 이유는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도윤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 영상은 자신과 반대의 이유로 한용수를 쫓고 있던 것이 아닐까? 가령 한용수가 붙잡혀 스승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을 막으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윤은 영상이 한용수를 없애기 위해 그를 찾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내 직접 반촌으로 들어갈 것이네. 반촌 사정을 잘 아는 김정언과 동행할 것이니, 자네는 청금복(靑衿服)을 준비해 주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도윤은 명을 받은 현규가 빠른 걸음으로 대장청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성균관 반촌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한용수가 정말로 그곳에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반촌에 들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쩌면 반촌이야 말로 몸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은신처란 것을.
'스승님의 무고를 입증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 영상에게 한용수의 행적이 알려지기 전에 반드시 그자를 먼저 찾아야만 한다!'
드디어 한용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도윤은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생각에 깊이 잠긴 도윤의 검고 그윽한 눈빛이 밝게 빛이 났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형형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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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옥구현 관아를 둘러싼 담장 위에 소리 없이 내려서는 인영들이 있었다. 도합 서른은 족히 넘을 듯한 수였다. 얼굴은 모두 검은 복면으로 가린 채였으나, 입고 있는 복색들은 제각각이었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에, 산짐승의 가죽을 덧댄 옷을 입고 있는 모양새가 얼핏 보기에는 산적 떼들로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두령으로 보이는 듯한 자가 신호를 보내자, 불길이 붙은 화살 수십 대가 동헌으로 날아들었다.
"목표는 옥사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다. 한 놈도 살려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현감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좋을 것은 없으니, 현감은 죽이지 않도록 명심해라. 현감 외에도 몇몇을 더 살려두어, 살아남은 자들이 산적들의 소행이라 증언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두 알겠느냐?"
무리에게 명을 한 뒤, 앞장서서 동헌 앞마당으로 달려 나가는 이는 다름 아닌 영환의 심복, 장석형이었다. 석형은 상민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옥구현 관아를 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비록 영환이 현감의 아들을 먼저 찾지 못한 것까지는 눈감아 주었지만, 만약 그가 무사히 의금부로 호송되기라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자신과 수하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허나 여동생의 안위가 영환의 손에 달려있는 이상, 석형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 일을 성사시켜야만 했다.
비몽사몽간에 불을 끄기 바쁘던 관노들이, 뒤늦게 산적 떼들을 발견하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노비들의 비명소리에 달려 나온 나졸들이 무기를 들고 대항했으나 일합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관기들의 비명소리까지 더해져, 옥구현 관아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덕수는 본능적으로 내아 밀실에 숨겨둔 김상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덕수는 결연한 표정으로 장검을 손에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결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실린 듯 검광이 번쩍 빛을 발했다.
옥사에 갇힌 죄수 중 상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석형의 눈에, 내아 앞을 지키고 선 채 수하들을 베고 있는 덕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눈에 그가 새로 부임한 현감임을 알아본 석형은 피 묻은 검을 늘어뜨린 채, 빠른 걸음으로 덕수에게 다가갔다. 석형의 곁으로 수하 둘이 따라붙었다. 덕수는 제게 다가오고 있는 석형이 내뿜는 살기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오늘이 제 제삿날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드는 덕수였다. 하지만 덕수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상민을 지켜낼 생각이었다.
석형과 덕수의 검이 맞부딪혔다. 사력을 다해 달려드는 덕수에 비해, 그를 죽일 수는 없는 석형의 움직임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석형은 생각보다 집요한 덕수의 공격에 눈살을 찌푸렸다. 현감과의 결투 따위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내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상민을 찾아내, 그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 석형의 목적이었다. 석형은 어느덧 덕수의 뒤로 다가온 수하들에게 눈짓을 하며, 일부러 크게 몸을 휘둘러 덕수에게 허점을 드러냈다. 덕수가 이를 놓치지 않고 석형에게 달려든 순간, 뒤에 있던 수하가 칼등으로 덕수의 머리를 내리쳐 그를 기절시켰다. 석형은 덕수가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한 뒤, 수하들과 함께 내아로 들어가 상민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상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상민은 분명 내아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날카로운 눈으로 방 안을 구석구석 훑던 석형의 눈에 문득 서탁 뒤에 놓인 병풍 하나가 들어왔다. 곧게 뻗은 대나무가 그려진 열 폭 병풍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석형이 거친 손길로 병풍을 걷어내자 그 뒤로 하얀 창호지가 발린 덧문 하나가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덧문을 열어젖히니, 놀랍게도 그 안으로 밀실이 존재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선 석형은 그곳에서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상민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행히 아직 한양으로 압송되기 전이었던 것이다.
석형의 얼굴을 알아본 상민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 그토록 두려웠던 죽음이었건만, 막상 눈앞에 닥치자 별로 두렵지가 않았다. 어쩌면 언제 죽을지 몰라 마음 졸이며 사는 삶에 지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석형의 검을 보며, 상민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결국은 이렇게 죗값을 치르는구나……. 하지만 영상 대감, 결코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석형은 상민을 죽여 증좌를 없애라는 영환의 명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상민이 보인 웃음이 영 마음에 걸렸다. 죽을 때가 되니 두려움에 미치기라도 한 걸까? 평상시 겁이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던 상민의 모습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마지막이었다. 석형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꺼림칙함을 애써 떨쳐내며, 수하들과 함께 관아에 있는 곡식과 재물들을 꺼내서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일이 산적들의 소행임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석형의 무리가 떠나고 난 뒤, 살아남은 자들의 울음소리로 뒤덮인 옥구현 관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뒤늦게 정신이 든 덕수의 눈에, 죽어서 시체가 된 사람들과 상처를 입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참혹한 광경들이었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겨우 내아 밀실까지 기어간 덕수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는 상민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어느덧 동틀 무렵이 되었는지, 첫닭이 홰를 치기 시작했다. 닭은 목청을 돋아 새벽이 밝아옴을 알렸지만, 평소와는 달리 그 소리에 아침을 맞는 부지런한 움직임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