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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3. 2024

33장. 병조판서의 서자

 앞마당에 널어 두었던 찔레열매가 잘 마른 것을 확인한 서연은 돌쇠에게 부탁해 그것들을 의원으로 가져갔다. 집에서 사용할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의원에 가져가 약재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영실(營實)이 아주 잘 익었군요. 좋은 약재가 되겠습니다. 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찔레열매의 상태를 살펴보던 승원이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서연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제가 스승님께 의술을 배우고 있는데 어찌 값을 받겠습니까? 그저 약재로 사용하려고 가져온 것일 뿐입니다." 

 "좋은 약재의 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제지간이라 하여 힘들게 키워낸 것을 거저 받을 수는 없습니다."

 승원의 외조부가 의원으로 있을 때는 종종 약초들을 팔러 오곤 했으나, 지금은 승원에게 의술을 배우고 있는 터라 값을 받는 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하루빨리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살려면 한 푼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서연은 마지못해 승원이 내미는 엽전을 받아들였다. 승원과 서연이 찔레열매를 내실로 가져가 정리하고 있는 사이, 웬 비복(婢僕) 하나가 들어와 승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도련님, 대감마님께서 오늘은 기필코 집에 들르시라 하셨습니다."

 의원에 들어선 비복을 본 순간 승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늘 훈훈한 봄바람처럼 상냥하기가 이를 데 없는 승원이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서연은 그동안 승원이 당연히 중인일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하인이 승원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대답은 지난번과 같다. 나는 대감께 드릴 말씀이 없으니 대감을 뵈러 갈 이유도 없다. 같은 용건으로 이곳을 더는 찾지 말거라!"

 단호한 승원의 말에 하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승원을 설득했다.

 "하오나 이번에도 도련님이 오시지 않으면, 대감마님께서 직접 여기로 납시겠다 하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승원은 곁에 있던 서연을 보며 잠시 갈등했다. 제 발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긴 했으나 의원에서 소란을 일으켜 서연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승원은 한숨을 내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하인을 따라나섰다. 

 "아씨, 사정이 있어 잠시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의원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갑자기 나타난 하인이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분명 이상했을 텐데 서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잘 다녀오라며 배웅을 해 줄 뿐이었다. 하인을 따라 의원을 나서던 승원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서연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승원은 그런 서연의 모습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



 북촌의 으리으리한 기와집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위용을 자랑하는 솟을대문 앞에 이르자, 하인이 멈추어 서서 문을 두드렸다. 조정의 실세 중 하나인 병조 판서 최윤덕 대감의 저택 앞이었다. 

 "도련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래?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부르는 소리에 달려 나온 청지기가 승원을 보고는 반색하며 얼른 사랑채로 승원을 안내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승원을 발견한 하인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승원을 반겼다. 

 "아이고, 도련님!"

 "승원 도련님 아니십니까?"

 게 중에는 기쁨에 겨워 울먹이는 하인들도 있었다. 승원은 그런 하인들의 환대에 부드러운 미소로 답을 해주었다. 다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으나 저를 반기는 하인들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의원에 찾아가겠다는 협박이 효과가 있긴 했나 보구나. 네가 이리 걸음한 것을 보면 말이다."

 잔뜩 굳은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서는 승원을 보며 윤덕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비가 강녕한지가 궁금하면 진즉에 얼굴을 비추었어야 할 것 아니더냐? 네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내버려 두었으면, 이제 그만 방황하고 집으로 들어오너라."

 "이곳은 병조 판서 대감과 그 식솔들이 기거하는 곳이지 제 집이 아닙니다."

 승원의 단호한 목소리에 윤덕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어미가 너를 이곳에 맡기고 갔을 때부터 여기가 너의 집이다. 비록 서자라고는 해도 너도 이 집안사람이다. 언제까지 의원 나부랭이로 살 생각이냐? 네 어미가 죽은 충격으로 시름이 클 것이라 여겨, 집을 나가 지내겠다 했을 때도 아무 말 않고 허락해 주었다. 허나 이제 세월도 흐를 만큼 흘렀으니 너도 그만 정신을 차리고 집에 들어와 무과를 준비하거라."

 "저는 무과를 치를 생각이 없습니다. 대감께는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는데, 뭣 때문에 호적에도 오르지 않은 제게 이러십니까? 앞으로도 저는 의원으로 조용히 살아갈 것이니 그냥 없는 존재로 여기십시오."

 윤덕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의사를 따박따박 밝히는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인이었던 제 어미를 빼다 박아 누구라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드는 수려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봐도 서자인 것이 안타까울 만큼 모든 것이 뛰어난 아이였다. 본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승원의 반만 되었어도 서자인 승원을 불러 앉혀 굳이 입씨름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원보다 두 살 아래인 승문은 머리가 둔하여 소과조차 번번이 낙방하기 일쑤였다. 더 이상 승문에게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윤덕은 서자인 승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억지로라도 승원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 윤덕은 한숨을 내쉬며 승원이 제 집에 오게 되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



 승원의 어미는 의원의 여식으로 윤덕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었다. 윤덕은 아름답고 마음씨마저 고왔던 그 여인을 진심으로 연모했다. 허나 과거에 급제하고 나니 중인이었던 그 여인을 부인으로 들이기에는 자신의 야심이 컸다. 냉정하게 그 여인을 버리고 권세가의 여식과 혼인을 하고 난 뒤에야 그 여인이 제 아이를 가졌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혼자 아이를 낳아 조용히 키웠고, 윤덕도 굳이 그들 모자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 승원이 열 살이 되던 해, 승원의 어미가 저를 찾아왔던 것이다. 부디 아들을 거두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다시 만난 그 여인을 보니 지난날의 애틋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하였으나, 자신의 첩으로 들어올 여인이 아니었다. 오직 아이만 자신에게 보내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연모했던 여인을 꼭 닮은 데다 영특해 보이는 아이의 눈빛이 마음에 들어 윤덕은 승원을 받아 주었다. 승원은 어미와 떨어져 살게 된 것이 충격인 듯 보였으나, 어미의 당부 탓인지 낯선 환경에서도 잘 견디고 적응해 나갔다. 아마 달포에 한 번은 제 어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이에게 낯선 곳에서도 버텨 낼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윤덕은 승원을 승문과 같은 서당에 보내어 글공부를 시키고 또한 무예까지 가르쳤다. 서자인 승원이 나중에 무과를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원과 승문의 격차는 벌어져, 처음엔 단순히 무과라도 치르게 하려던 생각이 점점 승원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아비의 기대가 서자인 승원에게 집중되자, 승문은 제 어미와 함께 승원을 쫓아낼 온갖 궁리를 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번이 윤덕에게 혼쭐만 날 뿐이었다. 윤덕의 처와 승문은 윤덕의 눈을 피해 끊임없이 승원을 괴롭혔다. 반면 집안의 모든 하인들은 인성이 좋고 마음이 따뜻한 승원을 진심으로 따랐다. 

 승원은 과거에 급제해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실 그날을 위해 착실히 학문에 정진하고 무예를 닦았다. 하지만, 어미가 죽고 나니 승원이 모든 것을 참으며 윤덕의 집에서 살아갈 이유가 사라졌다. 몸에 병이 생겨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된 어미가, 혼자 남게 될 자신을 생각해 아비인 윤덕에게 자신을 맡겼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 무과에 급제하는 것이 어머니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고 난 승원은 미련 없이 윤덕의 집을 나왔다. 

 윤덕은 그런 승원을 붙잡지 않았다. 어미의 죽음으로 너무도 상심이 컸던 승원을 억지로 붙드는 것보다 시간을 주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자라는 신분의 한계를 넘는 길은 무과에 급제하는 것밖에 없었다. 따라서 얼마못가 승원이 다시 집으로 들어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윤덕의 착각이었다. 승원은 오직 제 어미를 위해 무과 공부를 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승원은 집을 나간 뒤로 의원이었던 외조부와 함께 살며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워낙 총명했던지라 의술을 익히는 속도도 매우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조부의 일을 도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종국엔 외조부의 의원을 물려받아 진짜 의원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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