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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18. 2024

31장.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

 "서연아, 나는 정언 나리와 함께 돌아가봐야 할 것 같구나. 지평 나리가 계시니 안심하고 먼저 가볼게. 오늘 너와 함께 해서 정말 즐거웠단다. 우리 다음엔 좀 더 많은 시를 읊어 보자꾸나."

 혜인은 서연과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지 선뜻 걸음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진운에게서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난 뒤에야 마지못해 발길을 돌렸다. 서연도 멀어져 가는 혜인의 뒷모습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세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서연은 문득 이곳에 도윤과 둘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긴장감에 절로 몸이 굳은 나머지 차마 도윤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어색한 표정으로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도윤은 그런 서연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헐거운 도포 자락 뒤로 가느다란 목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다, 갓으로 덮고 있는 얼굴은 지나치게 희고 곱기만 했다. 비록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비칠 뿐이었다. 이 모습을 다른 사내들이 보고 있었다 생각하니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미는 것만 같았다. 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연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영주댁이 걱정하고 있을 게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과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말없이 걷기만 하던 두 사람은 광통교 아래에 이르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잔잔히 흐르고 있는 개천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가을 밤하늘 아래, 졸졸졸 들려오는 물소리가 더없이 맑고 경쾌했다. 그 청량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느덧 옆에 있는 도윤을 덜 의식할 수 있을 만큼 서연의 마음도 많이 편안해져 있었다.

 "주막 나들이는 어떠하였소? 그대가 이런 모습으로 주막에 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소."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고, 도윤이 먼저 말문을 뗐다.

 "주모의 음식 솜씨도 훌륭했고, 혜인 언니와 시를 읊는 것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것이… 주막이 그리 신명 나는 곳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 땅에서는 여인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잠시나마 자유를 느끼며, 문득 사내들이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주막에서의 시간이 정말로 즐거웠던지 을 하는 내내 서연의 얼굴에선 생기가 흘러넘쳤다. 서연이 주막에 있다는 사실을 걱정만 했을 뿐, 서연의 이런 마음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도윤은 난처한 얼굴로 서연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같은 사내들은 당연하게 해오고 있는 것들이 여인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일이란 것이 어쩐지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서연에게 말했다.

 "나는 내 부인을 규방에만 갇혀 살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서책을 읽고 싶으면 마음껏 서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부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해 줄 것이오."

 '예… 오라버니라면 그리 하시겠지요……. 오라버니의 부인이 될 여인은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

 서연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할 도윤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여인과 혼인하라고 등을 떠밀면서도 이런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하다니…….

 "참, 그대와 상의할 것이 있소."

 도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서연의 상념을 깨트렸다.

 "말씀해 보십시오."

 "옥구현에 감찰을 갔을 때, 알게 된 기녀가 있소."

 도윤의 입에서 나온 기녀란 말에, 서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서연의 표정을 보고 당황한 도윤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오."

 도윤을 잘 아는 서연이 그가 기방에 드나든다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다만 어찌하여 그가 기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본디 양반가의 여식이었으나, 집안이 망하고 부모마저 여읜 뒤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관기로 팔려온 아이라오. 올해 열넷이 되었다 들었소."

 자신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문마저 몰락하였다니……. 서연은 가슴이 아렸다. 그 아이가 겪었을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데려와 그대와 영주댁과 함께 살게 하면 어떨까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집에 그대와 영주댁 단 둘이서만 지내는 게 늘 마음에 걸렸소. 물론 그대가 원치 않으면 그리하지 않아도 되오. 다만 그대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오."

 올해 열 넷이라면…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다는 도윤의 누이동생이 살아있었더라면, 바로 그 나이였을 것이다. 서연은 도윤이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누이동생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는 사실알고 있었다. 아마 그 기녀를 보며 죽은 누이동생 생각이 났을 것이었다. 게다가 양반가의 여식이었다가 집안이 망해버린 그 아이의 신세가 서연과도 겹쳐 보여 더욱 마음이 쓰였겠지…….

 "얼마 전엔 혜인 언니처럼 좋은 언니가 생기더니, 이번엔 여동생이 생기겠군요. 적적하던 집에 활기가 돌겠습니다."

 서연이 활짝 웃으며, 수락의 뜻을 내비쳤다.

 "고맙소. 그 아이가 먹을 양식은 걱정하지 시오.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하리다. 이제 식구가 하나 더 늘었으니, 내가 보내는 양식이 많다 타박하지 마시오.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라 잘 먹어야 할 게요."

 서연은 도윤이 어떻게든 제게 양식을 더 보내주고 싶어 핑계를 대고 있단 걸 알았지만, 당장은 달리 거절할 방도도 없었다. 늘 그에게 고맙고 미안하기만 했다. 그에게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지 못함이 서글펐다. 어렸을 때는 그런 걱정 없이 마냥 도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았는데…….  하지만 언제까지 도윤에게 도움을 받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제법 약초를 재배하는 것도 능숙해졌고, 영주댁에게 들어오는 소일거리도 늘어나고 있었다. 서연은 곧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꾸만 감상적이 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문득 제 집에 오게 될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해진 서연이 도윤에게 물었다.

 "이름은 문초희라 하고, 현을 무척 잘 다루는 아이라오. 그 아이가 현을 타는 소리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었소. 아마 그대도 듣고 나면 깜짝 놀랄 것이오. 옥구현에 있을 때, 초희가 타는 현소리를 들으며 그대를 향한 그리움을 누를 수 있었소."

 서연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도윤의 부드러운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계속 그 눈을 마주하고 있다간, 제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유모가 기다리겠습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다급히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 서연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해 갑자기 자신을 잡는 도윤의 손길에 의해 멈추어 서고 말았다.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갓끈이 풀릴 것 같소. 처음 맬 때 너무 헐겁게 맨 듯 하오. 내가 다시 매어 주리다."

 제가 하겠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갓끈을 매어 본 적이 없는 서연은 얌전히 도윤의 손길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도윤의 손가락이 목에 닿을 듯 말 듯 스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진 서연은 차라리 도윤이 갓끈을 다 맬 때까지 두 눈을 감고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순간 부드럽게 움직이던 도윤의 손길이 멈추었다. 서연은 이제야 끝이 났나 싶어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두 눈을 뜬 순간, 서연이 마주한 것은 허리를 숙여 제게 시선을 맞춘 도윤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었다.

 "그런데, 눈은 왜 감고 있는 게요? 혹여나 다른 걸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 아닙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잠시 감았을 뿐입니다!"

 지난번부터 어쩐지 도윤에게 휘둘리고 있는 듯한 것은 기분 탓일까? 힘들게 벌려 놓은 그와의 간격이 자꾸만 좁혀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저조차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도윤은 도망치듯 앞서 나가는 서연의 뒷모습을 보며 쿡쿡 웃음이 나왔다. 당황한 나머지 왼팔과 왼다리가 함께 나가고 있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하늘빛 도포자락 아래 드러난 저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기다리시오, 낭자. 같이 갑시다."

 청계천을 따라 가지런히 피어난 노오란 황국화가 옅은 바람에 흔들리며 황금빛 물결을 자아내고 있었다. 긴 다리로 금방 서연을 따라잡은 도윤은 비록 손을 맞잡고 걸을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서연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푸른 달빛 아래 더욱 탐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는 황국화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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