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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1. 2024

32장. 또 다른 조력자

 조횟날 아침,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인정전에 도착해 의관을 정제하고 있던 휘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직 조회가 열리기 한참 전이라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더 많은 시각이었다. 휘가 돌아보니 간밤에 잠을 설치기라도 한 듯 푸석한 얼굴을 한 윤수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지난번 주막에서 보았던 자네의 친척이라는 그 도령들 말일세. 벌써 집으로 돌아들 간 겐가?"

 윤수가 주막에서의 일을 언급하자, 그날 혜인과 서연이 윤수와 함께 다정하게 서로 시를 주고받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불쾌함이 다시 솟아올라 휘는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로 답을 하고 말았다. 

 "이미 채비를 마쳐 길을 떠났네. 아주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는 친척 아우들이라 다시 한양에 올 날을 기약할 수 없으니 잊어버리게나."

 휘의 대답에 실망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윤수는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표정으로 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민도령 말일세. 내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도 닮은 듯하여……."

 예상치 못한 윤수의 말에 깜짝 놀란 휘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윤수도 성렬의 제자였기에 어린 시절 서연의 얼굴을 보았단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윤수는 서연을 연모해 제 아비를 졸라 청혼서까지 넣으려고 했었다. 도윤과 서연의 혼약이 정해지면서 포기해야 했긴 하지만...... 하도 세월이 흘러 그런 일이 있었단 것조차 깜박하고 있었던 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제 표정에서 다 드러났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연은 윤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윤수는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있어도 그 얼굴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휘의 얼굴에 스쳐간 당혹감을 읽어 낸 윤수는 역시 제 생각이 맞았단 걸 깨닫곤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그날 내가 본 게 서연 낭자가 맞았군그래. 처음엔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있어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민도령이라 소개하는 것을 듣고 나니 그 얼굴이 무척 낯이 익었다네."

 휘는 무어라 답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어쨌거나 윤수도 한 스승에게서 수학한 벗이었다. 비록 자신은 도윤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으나, 윤수가 그때 꽤나 진지했고 상심도 컸단 걸 잘 알고 있던 휘였다.

 "서연 낭자는 여전히 곱더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보다 훨씬 더 고와져서 눈을 뗄 수가 없었네."

 휘는 윤수의 말에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설마 아직까지도 윤수가 서연을 마음에 담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당장은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윤수를 위해서는 차라리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편이 나을 터였다.

 "단순히 옛 추억에 젖어 꺼낸 이야기라면 내 얼마든지 그 넋두리를 들어줄 수 있네. 허나 혹 서연이에게 아직 마음이 있는 거라면 하루빨리 그 마음을 접게."

 휘의 단호한 말에 윤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역시나 아직 미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휘는 좀 더 단호한 어조로 윤수를 다그쳤다. 

 "자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안이 몰락해 버린 서연이와 혼인할 수 있는가?"

 휘의 날카로운 물음이 윤수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 자신 있게 그리할 수 있다 바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으나,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대답 대신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면, 지평 나리는… 윤은 그리 할 수 있다는 겐가?"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윤이가 그리할 거란 것을. 서연이만 받아준다면 당장이라도 그리할 거란 걸 말일세."

 "하지만 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당장 이판 대감만 해도 그 혼인을 허락하시겠는가?"

 "물론 쉽지 않지. 몰락한 가문의 여식으로 윤이와 혼인을 하면, 윤이에게 해가 될까 하여 서연이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윤이는 서연이의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참이네. 거기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지. 자네, 서연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가?"

 "......"

 "안 됐지만 처음부터 자네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네."

 휘의 말이 구구절절 옳긴 했지만 윤수는 이대로 그냥 물러나고 싶지가 않았다. 왜 저는 무조건 안된다는 것인지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서연을 위해서라면 자신도 집안의 반대와 어떻게든 부딪혀 볼 생각이 있었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윤의 편만 드는군. 아까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나도 서연 낭자를 위해 내 전부를 걸 수 있네."

 휘는 윤수의 결연한 얼굴에 한숨을 내쉬더니, 윤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한번 그를 설득했다.

 "내가 왜 윤이 편을 드는지 아는가? 그건 바로 서연이의 마음이 윤이에게 있기 때문이네. 내겐 그 무엇보다도 그게 중요하거든."

 윤수는 반박할 수 없는 휘의 말에 할 말을 잃곤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윤수도 서연의 마음이 도윤에게 있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세월이 흐른 만큼 그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른단 일말의 기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이미 체념한 마음이었건만, 우연히 다시 서연을 만나니 잊은 줄만 알았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왔다. 그래서 아닌 줄 알면서도, 잠시나마 제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휘가 다시 되짚어주자, 가슴이 쓰리면서도 한편으론 후련한 마음마저 들었다.

 윤수는 휘가 자신을 위해 부러 더 냉정하게 말을 하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윤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휘는 그런 윤수에게 마주 웃어 보이며 위로의 뜻을 전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휘의 뜻을 알아챈 윤수였다. 윤수는 조회가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자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더니 휘에게 가까이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영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윤에게 조심하라고 이르게. 옥구현에서의 윤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군. 그리고, 사헌부 내에서도 각별히 신경 쓰라고 하게. 곳곳에 영상에게 말을 전하는 자들이 있네."

 "자네가 그걸 어떻게.....?"

 휘도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나도 스승님의 제자일세. 스승님이 억울하게 역모죄에 휘말려 그리 되셨는데, 내 어찌 영상을 좌시할 수 있겠는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그날 주막에서 보았던 호조의 좌랑들도 나와 뜻을 함께하는 믿을 만한 벗들이네."

 휘는 윤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고맙네, 내 윤이에게 꼭 전해 주겠네. 그리고…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 자네 정도면, 어느 집 규수라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걸세. 내 장담하지."

 윤수는 휘의 말에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제는 정말로 서연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다른 집 규수는 다 되어도 혹여나 예판댁 규수에게는 애초에 마음도 주지 말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휘가 덧붙인 말에, 윤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판댁 규수라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에 윤과의 혼담이 무효가 되었단 걸 알고, 그 집에 청혼서를 넣겠다는 가문이 한 둘이 아니던데… 몰랐는가?"

 "뭐? 그게 사실인가?"

 역시 소문이란 건 놀라울 만큼 빠른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혼담에 관한 이야기가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새 혼담이 깨졌단 소문이 다 퍼지다니……. 혼약이 무효가 되었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예판댁에 청혼서가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윤수처럼 인물도 훤하고 능력도 출중한 사내들이 청혼을 해온다면, 예판 대감이 그들 중 하나를 골라 혜인의 배필로 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휘는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졌다. 제가 지금 당장 혜인과 혼인할 것도 아니면서,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윤수는 매사를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는 휘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그날 주막에서 보았던 박도령이 어쩌면 예판 대감의 여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수는 비록 자신의 사랑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두 벗은 연모하는 여인과 함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윤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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