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애들을 학교에 무사히 보내고 난 날이면, 30분 정도 혼자 느긋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
짧다면 짧은 이 몇 분이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보통 동네 숲 속 공원길을 걷거나 동네 안, 나지막한 동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정도의 별로대단하지 않은 가벼운 코스들이다.
애들이랑 하루 종일 북적북적 요란하게 보내는 날도 좋지만 조용히 그저 나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무도 보고 주변 풍경도 보며 걷는 걸 좋아한다.
너무 느리게 걷는 탓에 운동은 1도 안되지만 기분전환만큼은 100을 보장하는 오직 나만 하는 산책이다.그래서 혼자라는 것이 이 산책의 가장 큰 메리트(merit)이다. 만약 아이들이나 옆에 사람이 있었다면 온정신을 상대방에게 쏟아 신경을썼겠지... 그런 나라는 것을알기에 이 순간만큼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오히려 자유로움으로 바뀌는 순간으로 변한다.
나라는사람은 좀 촌스러워 그리 활발하거나 명랑하지는 못해 트렌디(trendy)하거나 세련된 취미는 없고 이렇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을 비우며 느긋하게 걸으며 풍경 보는 걸 좋아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봄의 녹음은 여느 계절의 녹음과는 좀 다르다. 돌돌 말려 몸을 숨기는 앳된 새싹들과 봉우리들. 여린 연둣빛의 새눈이 빼꼼히 올라오며 푸릇푸릇 해지는 이파리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부드러운 잎사귀들이 새롭게 인사를 건네준다.움트는 생명의 에너지로 봄은 내게도 그 에너지를 전해준다.
이렇게 걸을 때는 되도록 음악도 듣고 싶지 않다. 이럴 때는 인공적인 소리가 없는 자연 소음이 좋더라.조용히귀 기울이니숲 속에서도 여러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 먹이를 구하는 새소리,
스륵스륵... 내 몸이 풀숲에 스치는 소리,
터벅터벅... 흙 밟는 내 발자국소리,
짹짹짹... 새들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
봄의 생명력으로 여기저기 화려한 꽃들이 저마다 색과 모양을 뽐내고 자랑한다.
화려한 벚꽃들이 한차례 축제가 끝나면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색색깔 옷을 갈아입고, 새하얀 조팝나무 꽃들과 수수 다리 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곁으로 커다란 목련꽃이 얼굴을 내밀고 길가에 핀 민들레와 앵초 꽃이 보이면 봄 풍경 완성이다.
'같은 분홍색인데도 이 꽃의 분홍과 저 꽃의 분홍이 이렇게나 다르네, 같은 흰색 꽃이어도 이리도 다른 모양이네.' 눈부실 정도로빼곡히 피어난 꽃들이 나 좀 보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물감들도 흉내 내지 못할 자연의 색이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의 짙은 코랄색(coral color)이라니. 계속 보는데도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둘러보니 매일 걷는 길인데 새삼 새롭게 보이고'여기가 진짜 우리 동네가 맞나?'드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차원의 문이라도 열린 게 아닐까 싶어 두근두근 되는 마음으로 자꾸 뒤돌아 보게 된다.
신기해진 우리 동네길.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저번 주에 찍어두어던 길가의 여러 봄꽃들
이제 봄이 가려한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마치 이대로 굳건히 계속해서 피어있을 것만 같았던 꽃들이 한송이 두 송이씩 떨어진다. 어제보다 더 쨍쨍해지는 햇빛에 잎사귀들은 어느새,여리던연두색에서 더 짙어진 초록의 향연으로 변하고, 점점 높이 솟아오르는 나뭇가지들과 무성 해지는 풀숲들이 여름의 준비를 한다. 조금씩 수분을 머금어가는 공기가 여름이 다가옴을 미리 알려주는 듯하다.
봄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 주었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이 할 일들을 했다. 그리고 봄은 여름을 위해 물러설 줄도, 그 자리를 비워줄 줄도 아는구나. 이제여름도 봄처럼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내뿜겠지. 늘 행해지는 자연의 순리인데 산책을 할 때면 유독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 세상에는 참 당연한 것은 없구나."
오늘처럼 산책하며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정신없이 살지 말고 계절과 좀 더 친하게 지내보자고 다짐해본다. 가는 계절 배웅도 잘해주고 오는 계절 마중도 좀 나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