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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Aug 28. 2022

여름의 끝자락, 할머니 그 그리운 이름

《여름의 책》을 읽고


"사랑은 참 이상해. "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
소피아가 위협하듯 말했다. "더욱더 사랑해야지."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소피아가 말했다. "가끔은 내가 이 고양이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애를
사랑할 힘이 없는데, 그래도 계속 애 생각만 나."
_본문 중에서.
토베얀손지음/안미란 옮김. 민음사(2019)

<여름의 책>은 북유럽 지역에선 가히 ‘국민 소설’이라 불릴 만큼 세대를 불문하고 애독되는 ‘소설가’ 토베 얀손의 대표작이다.

그들은 여름이면 작은 섬에 와서 산다. 소피아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가족은 이렇게 셋이다. 수풀 속에서 할머니의 틀니를 같이 찾으며 느닷없이 “할머니는 언제 죽어?”라고 당돌하게 캐묻는 아이 소피아는 눈앞의 모든 것들, 세상 전부가 궁금하고 새롭고 그저 낯설기만 하다. 생기 넘치는 왈가닥 손녀딸을 돌보는 나이 지긋한, 종종 언덕을 오르내리기가 버겁고 가끔씩 신경 안정제가 없으면 안 되는 할머니는 벌써 대자연의 걸음걸이와 보폭을 맞추고 있을 만큼 세상사가 익숙하고 느긋하기만 하다. 소피아의 여름은 늘 모험의 연속이고, 그 곁에는 항상 할머니가 있다.

토비 얀센 Tove Jansson(1914~2001)
50여 개국,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무민 시리즈’의 작가이자 오래도록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 온 ‘무민 캐릭터’의 창조자, 핀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소설가.
191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조각가 아버지와 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 무렵부터 잡지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헬싱키와 스웨덴 스톡홀름,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45년 『무민 가족과 대홍수』를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무민’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하고, 1976년 핀란드 사자 훈장을 비롯하여 여러 권위 있는 예술상을 받았다. 평생의 반려자 툴리키 피 에틸 레와 영감을 주고받으며 아동 문학뿐 아니라 소설, 미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2001년 고향 헬싱키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글 속 주인공 소피아는 제멋대로인 철부지 소녀다. 동방예의지국의 기준으로 보자면 할머니에게 버릇없이 보일 정도로 할머니에게 신경질도 내고 버럭 화내기도 한다. 아직은 철부지 소피아는 여전히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다.  

기기묘묘한 나무로 가득한 숲 속에서 오싹해하기도 하고, 잠시 놀러 온 친구와 아웅다웅 다투다가 홀로 토라지기도 한다. 우연히 거둔 길고양이를 보듬으면서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랑의 신비를 배우고, 작은 섬을 사들여서 대저택을 짓는 기업가 이웃에게서는 시골 바깥 세계, 어른들의 사회를 엿보기도 한다.

그런 소피아를 할머니는 어른의 입장으로,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소피아가 하는 말을 그저 묵묵하게 들어주고 다소 관조하는 것만 같기도 한 짧은 대답과 자신의 회상건네준다. 할머니는 소피아가 섬에서 자유로운 모험을 하는 동안 여름의 따스한 태양 아래 누워서 바뀌어 가는 계절과 흘러가는 시간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을 뿐이다. 아스팔트 도로를 내다보며 과거를 아쉬워하고, 모든 꿈을 잃어버린 오랜 친구로부터는 노년의 쓸쓸한 뒷모습을 들여다본다.  인생의 한편을 차지하는 기억의 구석구석에서 아스라이 애틋한 노스탤지어가 피어오른다. 인생의 찬란한 여름 속으로 막 달려드는 소피아와 저물어 가는 여름을 뒤로하고 저 머나먼 겨울로, 죽음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서글프도록 선명하게 교차한다.


철부지 소피아에게서 나의 유년시절이 투과된다.

다소 격의 없는 소피아의 말투는 무한한 할머니의 사랑이며, 할머니가 품어주는 사랑의 증거이다.

소피아처럼 나에게도 할머니라는 존재가 있었다.

나의 삶에서 뺄 수 없는 존재.

친애하는 나의 친할머니.

나는 쌍둥이 언니와 비롯 오빠와 함께 바쁜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우리 할머니는 그야말로 대한제국 사람이었다.

억척스러운 경상도 여자.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과도기를 이겨내며 가난으로 힘겨운 겹의 시간을 견디셨고, 긴 세월 뒤늦게 원망스러운 할아버지가 나타나실 때까지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젓갈장 사니, 나물 장사니 가리지 않고 가족들을 추스렀다.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던 할머니였다. 그리고 묵묵히 손주인 우리까지도 길러주신 분이다.

물론 살아오신 시대 탓에 아들 귀하다고 성별에 차이나는 대우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할머니의 사랑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나의 유년시절의 모든 순간을 함께였던 할머니

할머니는 바쁘신 부모님의 빈자리를 따뜻하고 훌륭한 시간으로 채워주셨다. 할머니 앞에서 조잘거리고 허구한 날, 형제들과 투탁 거리는 철부지 추억 속 나의 어린 시절, 할머니는 그저 내편이 되어 품어주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나의 성장 시간을 함께했다. 조금만 더 버티셨다면 백수도 맞이 하셨을 텐데... 어느 날, 할머니는 우리 곁을 조용히 떠나셨다. 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만삭이 되던 시기였다.  

할머니란 존재는 내게 많은 심적 유산을 물려주셨다. 힘든 순간이 오면,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거려주시던 그 손길의 느낌을 떠올리려고 노력하곤 한다. 터치만으로도 나의 모든 것이 용서받고 위안을 얻었던 할머니의 손길과 따뜻하고 포근했던 아름다운 미소도.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 마치 나의 여름을 끝내고 인생의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끝났을지 모를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준 할머니를 추억하며 나의 여름을 무사히 보내고 싶다. 그리고 나의 가을을 맞이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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