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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Oct 17. 2022

가족 소풍

소소한 행복

어느새 쌀쌀해진 바람이 생각 없이 입은 얇은 옷깃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걸 보니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다.

호기로운 마음으로 캠핑용품들을 샀었는데 부끄럽게도 제대로 된 캠핑 경험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묵혀놓은 캠핑용품들이 아까워 남편을 졸라 어디 가까운데라도 가자고 제안했다. 기회를 봐서 꼭 가자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번 연휴, 우리는 드디어 가까운 호수공원으로 다 같이 가족소풍을 가기로 했다. 집순이들, 집돌이들의 오랜만의 가족소풍이었다.


소풍(逍風)은 원래는 '바람을 쏘인다'는 뜻이나 학생들에게 운동 및 자연 관찰 등의 학습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사의 인솔 하에 야외로 나가 하루를 보내는 교육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인 개념의 소풍이 시작된 것은 개화기 이후의 일로, 근대적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당시에는 원족(遠足)이라 칭하였으며, 이때부터 소풍은 교육과정의 한 영역으로 정착되게 되었다고 한다.

17세기의 코메니우스(Comenius, J.A.)는 ‘자연은 가장 위대한 교사’라는 주창하에 학생들은 자연의 사물을 실제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로도 교육현장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근대 교육제도의 발달과 함께 교육현장의 관행이 되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소풍은 특정 교육기관에서 시작되고 유래되었을지 모르지만 "가족 소풍"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가족소풍은 그야말로 "가족"과 함께 가는 소풍이다. 가족 간의 유대감을 쌓고 현장의 계절감을 느끼며 아이와 자연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다. 긴장과 일상의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 수 있고, 아이에게 새로운 감각을 길러줄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사실 이 날 나는 솔직히 여유롭지 못했다.

오랜만의 소풍이라 나도 들떠있었지만 소풍 도시락에, '혹시를 대비해서' 이 물건, 저 옷들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도시락 음식들을 만들고 담고, 도시락 싸고 난 뒤의 부엌을 정리하고, 아이들 옷도 찾아줘야 했고, 나도 씻고 준비해야 했다.

남편도 캠핑용품들과 도시락 가방들을 옮기느라 바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래도 나보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내발에는 화닥 화닥 불이 붙었는데.

우아하고 완벽하게 즐기고 있는 나와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준비했기 때문에 더 의욕이 앞섰던 것 같다. 난 이게 문제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나만 오버하고 난리 블루스다. 어찌 됐든 그렇게 겨우 준비를 끝내고 헐레벌떡 나왔다.


우리가 마음에 둔 소풍장소까지 무거운 가방을 낑낑대며 들고 걷다가 발을 잘못 헛디뎌 결국은 흙바닥에 '철퍼덕'넘어지고 말았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바지 왼쪽 무릎 쪽에 흙 구멍이 생겼다. 속상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순간 울컥하며 기분이 안 좋아졌다.

다들 오랜만에 나온 바깥나들이에 자기 자리 잡느라 내가 넘어졌는데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각자 기분만 좋아 보인다.

그때부터 나만 열심히 준비한 거 같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울컥! 화도 난다.

들떠서 좋다고 재잘재잘 엄마에게 말 거는 딸에게 웃으며 답해줄 수도 없었다. 잘 도와주다 결정적으로 곁에 없었던 애꿎은 남편이 얄밉기도 했다. 저리 좋다고 허밍 하며 걷는 해맑은 첫째에게 뭘 바라겠나 싶고, 막내는.... 어후, 넘어가자.

분명 기대하며 기분이 좋아할 소풍이었는데 이렇게 힘들 거면 그냥 집에 있을걸 그랬다.

날씨도 소풍에 걸맞은 화창한 날씨가 아니다. 왜 오늘따라 이리 흐린 지!  바람도 많이 불고 쌀쌀하고 춥다. 우리가 펼친 자리도 경사진 거 같고 울퉁불퉁한 거 같아 불편하다.

괜히 무릎이 더 아려오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펼치고 툭툭 거리며 남편과 짐 정리를 시작했다.

이미 가족들은 내 눈치를 보느라 긴장감에 조용해졌다. 이게 소풍...?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가족들이 두런두런 둘러 모여 준비한 음식을 다 같이  먹고, 물론 뾰로통한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눈치 보며 필사적으로 음식들이 맛있다고 칭찬 한 마디씩 해주니 주뼛주뼛 내 기분도 점점 바뀐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커피 한 모금 들이킨 그제야 자연의 바람이 느껴진다. 좀 좋은데?

그제야 이왕 왔는데 기분 좋은 추억 남기고 가자는 생각이 든다. 무릎 정도는 이쯤이야 참을만하다.

흐리니 눈부시지도 않고 딱 좋다. 선선한 바람이 땀도 안 나고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딱 좋다.

사람 마음이 이리 간사하다.

가을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코스모스 꽃.

밥을 먹고 가볍게 가족 산책을 나선다.

길가에 코스모스에 갈대밭이 이제 가을이라고 알려준다. 길가다 공원에 조성된 꽃들을 보며 가을에 피는 꽃이 의외로 많은 걸 보며 좀 놀랐다.

가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하고 알록달록 핀 꽃들을 보며 어느새 뾰로통한 내 기분은 모두 사그라졌다.

이름도 생소한 가우라란 꽃이다. 분홍나비 바늘꽃이라고도 하고,호랑의 눈을 닮은 꽃이라고도 하단다.
붉게 물든 댑싸리와 보라보라한 도라지꽃
에키나세아 꽃들과 이름도 귀여운 꽃범의 꼬리(좌아래), 층층이 핀 층꽃나무(우)
알록달록 여러색색의 백일홍들과 새하얀 은쑥
하얀 구절초와 가을에 어울리는 산국화들과 이름도 특이한 보라색 꽃향유.

가을꽃들을 보며 산책하면서 어느새 기분이 다시 맑아졌다. 꽃 사진도 찍고 이름도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니 지난 시간들은 점점 잊었다.

한결 깨끗해진 기분이다.

가족들과 같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깔깔 웃으며,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집에 오니 정리해야 할게 한 짐이고 설거지가 한가득이지만 치유받고 얻어온 여유의 값은 이 모든 상심과 고생이 아무렇지 않은 듯 소중한 것들이었다.

소풍이 이런 거지. 우리 다음에 또 오자!^^




이틀 동안 브런치가 안돼서 당황스러웠어요.

몇 번이고 들어와 보곤 했었네요.

매일 들여다본 브런치를 보며, 여태껏 브런치 없이 잘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안되니 일상들이 참 헛헛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글 벗님들의 소식과 작가님들이 글들이 유독 보고픈 이틀이었습니다.

이제서라도 소중한 일상을 돌려받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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