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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해 Feb 21. 2022

중딩이지만, 평창올림픽 자원봉사자입니다

아들의 올림픽 봉사와 꿈 이야기 

1. 평창 올림픽 자원 봉사자 합격 


아들 중 2 때,  평창올림픽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봤다. 일 년 전부터 봉사자를 모으는 모양이다. 

강원도 홈페이지 공고를 보니 2018년 기준으로 만 15세 이상이면 응모가 가능했다. 

영어 통역 봉사를 해보면 어떻겠는지 아들에게 제안했고 해보겠다고 한다.  

뭐든 일단 해보겠다고 하는 성격임을 내가 알지. 통역 자원봉사자로 지원서를 냈다


일주일 뒤 전화로 진행되는 영어 인터뷰를 마쳤다. 


"어때? 인터뷰 어려웠어?"

"아니, 별거 안 묻던데. 뭐 여행 다녀본 적 있냐, 유학 가서 어디에 있었냐 이런 거 물었어"

(아들은 11살 때 밴쿠버에서 약 1년간 홈스테이 유학을 했었다. )


얼마 뒤에 자원봉사자 합격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고. 뭔지 모르고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 




2. 미리 가본 올림픽 



올림픽 1년 전, 세미 올림픽을 평창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때 봉사자를 지원받는단다. 기 합격한 사람 대상으로 온 메일이었다. 아들은 가겠다고 했다. 강원도에 혼자 2주를? 

강하게 가고 싶다고 해서 숙소는 네가 알아보라고 했더니 하루 3만 원짜리 숙소를 구해왔다.

오케이 했고, 우리집  중2는 혼자 2주 동안 자취하러 집을 떠났다. 


참가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에게 버스를 타는 것을 도와주는 등 길 안내를 했다.  터미널에서 난로에 석탄인가도 채우는 일도 했다. 같이 일하시는 통역 봉사자분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살다 오신 어르신인데, 영어가 아무래도 부족할 땐 대신 통역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버스를 놓치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정시가 되면 소리를 지르며 버스 편을 안내하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 그곳에 만난 고속버스 사장님, 편의점 사장님, 봉사자 어르신 그리고 유스호스텔 사장님에게서 인생을 배웠다고 한다. 웃음이 났다. 16살에 인생을 벌써 배우면 어떡하니. 돌아온 아들은 중 3이 되었다. 




3. 평창 동계 올림픽 자원봉사


진짜 봉사할 시간이 돌아왔다. 그런데, 아들이 중3인 터라, 고등학교를 정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본인의 의지대로 서초동 S고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지원서를 냈다. 자사고 아닌가? 내신은 안 보나?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어리둥절 한 와중에 아들이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은 아이,  경쟁력이 1.02  였다. 내신을 따기 어렵다는 소문이 자자해지면서 자사고의 인기가 한참 떨어졌던 게다. 다행히 S고 합격하고 평창올림픽은 가벼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다.  정식 올림픽이다 보니, 숙소, 식사, 그리고 일당이 지급되었다.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뿌듯함이 나에게도 번져왔다. 이번에는 컨테이너 같은 부스 안에서 길 안내와 프로그램 안내 통역을 했다. 영어 담당이었지만,  일본어 통역을 하시는 분이 바쁘시면 본인이 일본어 통역도 했다고 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 안내 부스 


"머?? 네가 일본어 통역했다고?"  아침에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며 방학 때 3개월 일본어 회화반을 다녔던 적이 있다.  하지만 3개월 하면 통역을 할 수 있나? 정말 의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그곳에서 설을 맞이했다. 군수를 만나서 용돈을 받았단다. 정말 궁금해 얼마 받았는지 물어봤다. 2만 원 맛있는 거 사 먹었단다.  소소한  에피소드와 함께 평창 올림픽은 온 국민의 힘으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한 달 뒤 아들은 올림픽 자축 무대에 봉사자 대표 중의 한 명으로 참석하여 깃발을 흔들었고, 강원 도지사 표창장을 받았다. 가문의 영광이다.  평창에서 근무하느라, 중학교 졸업식은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께 졸업장과 선물을 받아왔다.  그렇게 집을 나간 아들은 철들어 돌아왔다. 

   

평창 올림픽 국민 감사 대축제 행사 무대



4. 꿈이 생기다 


아들의 인생에 평창 올림픽이 들어온 것에 정말 감사하고 있다. 지금 스무 살인 아들은 이때의 추억을 인생에서 제일 좋은 기억 중 하나로 꼽는다. 그 이후, 부족하다고 느낀 일본어를 더 배우려고 학원을 다녔다.

또 운 좋은 아이!  기막힌 찬스로 일본 교환 학생의 기회를 얻었다. 일본 대학을 가고 싶다는 확신이 자라고 있었다. 도전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꿈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로서 해준 것은 "허락"이었다. 

엄마로서 제일 잘한 것은 "믿음"이었다. 



믿어준 크기만큼 자라는 사람, 그게 자식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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