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웅변대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중학교 2학년. 나는 반공 웅변대회 순서를 기다리며 앞서 쩌렁대게 외쳐대는 친구의 연설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한 달 전.
“네가 임원이니깐, 웅변대회 한번 준비해 볼래? 선생님은 네가 잘할 것 같은데.”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부르셔서 부탁하셨다. 웅변을 한두 번 본 적이 있었지, 해 본 적은 없었다.
“네.”
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계속 마음이 바뀌었다. 교무실로 갔다가 돌아왔다가 반복하다 그냥 집으로 왔다.
선생님이 원고도 직접 써보라고 하셨다.아빠 고향은 경기도 장단군, 지금은 북한 땅이다. 나는 아빠의 고향 이야기로 시작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원고 쓰는 건 수월했다. 다음 날 담임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더니 잘 썼다고 하셨다. 몇 군데 손봐주시고는,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집에서 연습해 봐. 욕실 같은 하면 좋아.”
라고 귀띔해 주셨다. 우리 집에는 욕실이 없었다. 부엌에서 쪼그리고 씻는 정도였으니, 큰소리를 내서 연습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또 일어나서 손동작까지 넣어가면서 혼자 멋대로 연습했다. 어느 정도 원고를 외우기는 했지만 실제처럼 웅변을 해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원고를 내밀며 원고를 봐달라고 했다. 엄마는방문과 창문을 닫더니 해보라고 하셨다.
“조금 더 크게 해 봐!”
“더 더 크게! 괜찮아. 크게 해도 될 것 같은데? “
엄마앞에서 큰 목소리로 숙제 검사받는 기분이란 영 쑥스럽고 창피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원고를 들여다보시던 엄마는 제법 괜찮은 웅변 선생님이 되셨다. 두 손보다 한 손만 드는 게 낫겠다며, 본인이 직접 연사 흉내를 내며 시범까지 보여주셨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선생님은 반 아이들 앞에서 웅변을 해보라고 하셨다.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분명히 다 외웠는데 교실 앞에 나가니 첫마디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원고를 다시 들춰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시작했다.
“저희 아버지 고향은 경기도 장단군입니다. 북에서 넘어오신 실향민이십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 우리 민족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중략) 하루빨리 통일되어야 한다고 이 연사 강력하게 외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했고, 소리를 질러댄 목이 따끔하니 아팠다. 선생님은 잘했다며 내 등을 두드려주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친한 친구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리 감동적일 것도 없는 내 연설에 눈시울을 붉혀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그날 이후로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며칠 뒤 전 학년이 모이는 운동장 연단에 서게 되었다. 검정 치마에 흰 블라우스, 그리고 키 작은 단발머리 소녀가 연단에 올라갔다. 아이들이 가득 운동장을 채웠고, 그 밑으로 수천 개의 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 저희 아버지 고향은 경기도 장단군입니다.”
마이크를 처음 써 봤다. 교문 밖까지 퍼지는 걸 듣고는 너무나 쩌렁댄 내 목소리에 놀랐다. 중간에 한 문장을 놓쳤지만, 끝까지 마무리했다. 연단에서 내려오는 순간 교문 너머 육교 위에 서 계신 아빠가 보였다. 딸이 웅변하는 모습을 보고 가시려고 출근하다 말고 한참 육교 위에 서 계셨다.
나의 첫 웅변의 결과는 최우수상. 웅변에 소질이 있다는 담임 선생님 말씀에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해마다 웅변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그 뒤로 웅변대회는 없어졌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의 유언은 고향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그 약속은 지켜 드리지 못하고 화장을해 뼛가루를 어느 강가에 뿌려드렸다. 나의 첫 웅변대회날 육교 위에서 한참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 따라 생생하다. 다시 고향 땅을 밟아 보지 못하셨지만, 그날 연단에서 외쳤던 ‘통일’ 그 한마디가 아빠에게 드린 가장 큰 선물이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