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

상실의 시대 1980

by 아침해

학년 초 친한 친구들은 모두 딴 반이 되면,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그나마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서 도시락도 먹고, 청소도 하고, 체육도 하면서 금세 친해졌다. 중학교 2학년, 한 반에 50명이 넘었던 시절, 그 모든 아이를 일주일이면 다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여중생의 수다 힘이 아닐까 싶다. 특히 여자 중학교였으니 어련했을까?


유독 내 뒤에 얼굴이 창백하고 말이 없는 W가 앉았다. 원래 말이 없나 보다 했는데 일주일 동안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작년에도 이렇게 말이 없었다고 S가 알려줬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수학 시간이었다. 남자 선생님은 목소리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칠판 앞에 나와서 수학 문제를 풀게 했고 질문도 많이 하셨다. 어느 날인가 반 아이들에게 여러 질문을 하셨다. W 차례였다. 그런데 한참 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 뒷자리의 W의 자리로 오셨고, 재차 질문을 하셨다. W는 입을 꾹 다물고, 책상만 쳐다봤다.


“모르겠으며 모르겠다고 말해라. "

선생님이 친절히 말씀하셨다.


“모르겠다고 해~”

주위 아이들이 옆에서 수군댔다.

“ …….”


선생님의 목소리가 커졌다.

“모른다고 말해.


이미 수차례 물어보시고, 대답을 원하셨으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찰~ 싹”

내 머리 뒤로 따귀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한 번 더 착! 손바닥이 뺨에 붙었다가 떨어지지 않은 듯한 소리였다.


적막이 흐리고, 그냥 적막이 또 흘렀다. 수업종이 쳤다. 선생님은 나가셨고, W는 책상에 그냥 엎드렸다. 벌렁이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한 채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 친구는 W의 등을 문질러 주고 있었다. 작년에 한 반이었던 S였다. 아마 여러 번 이런 일을 본 듯했다. W는 붉어진 볼을 한 채로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갔다. 나는 S에게 작년에도 이렇게 말 안 해서 맞은 적이 있냐고 물어봤다. 가끔 손바닥 때리는 선생님 계시긴 했지만, 대 놓고 따귀를 두어 차례 갈긴 선생님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W는 왜 그랬을까? 선생님은 왜 때렸을까?


다음날 W에게 어떤 말이라도 걸고 싶었다. 그냥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건가? 솔직히 어제 일이 상처가 된 건 아닐지 궁금해서 괜찮은지 묻고 싶었지만, 엉뚱하게 연필을 빌려달라고 했다.


“W야, 내 샤프가 고장 났는데. 샤프나 연필 있으면 하나만 빌려줄래?”

필통을 뒤지더니 연필을 하나 내주었다. 말은 없었다. 더 이상 이어갈 말이 없었다. 연필을 쓰고 돌려줄 때 말을 걸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점심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할까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우리는 친하지 않았다. W는 도시락도 혼자 먹는 것 같았고 어떤 날은 먹지도 않는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연필을 돌려주려고 W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연필 잘 썼어, 진하게 잘 나오더라”

“내일은 두 자루 가지고 와, 또 빌려 쓰게”

W가 날 바라보더니 픽 하니 웃었다.


“야, 너 웃을 줄도 아냐?”

속으로 이 말을 하지 말 걸 후회했다.


다음 말에는 웃지도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 수학 시간이 되었다. 숙제 검사를 한 뒤 앞에 나와서 문제를 풀게 했다. 45분 내내, 선생님이 W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모든 반이 초긴장을했다. W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수학 시간이 끝나자마자 W에게 말을 걸었다.


“연필 빌려줄 수 있어? “

사실 나는 연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그녀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응, 가지고 왔어.”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오늘 처음 입을 열었는지, 입에서는 구취가 섞여 나왔다. 작년 같은 반인 S가 자리에 왔다. W와 3명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S와 나는 수다를 떨었다. W는 동참하지 않았다.


W에게 물었다.

“너는 원래 이렇게 조용해?"

W는 말은 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집에 갈 때 S에게서 W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W는 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빠와 오빠랑 지금 살고 있다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부터 말이 적어졌다고 했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된 뒤부터는 공부도 잘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실어증이 아닐까 싶었다. 수학 선생님은 이런 내막을 알고도 따귀를 때린 것일까? 때려서라도 W를 말하게 하고 싶은 거였을까?


그 뒤로도, 일 년 내내 수학 시간에 선생님은 W를 다시는 부르지 않으셨다. W는 2학년 내내 하루에 두 마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W는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


지금 중학생을 키우고 있는 엄마가 돼 보니 W를 만나서 한번 꼭 안아주고 싶다.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못했을 그 마음을.



작가의 이전글아빠에게 드리는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