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원하는 이유
마지막 장만 남은 달력을 새 것으로 갈았다. 아직도 아버지는 달력을 보시고, 날짜에다 빨간색 동그라미를 치시거나, 메모를 적어놓곤 하신다.
형은 먼지 쌓인 기타를 털어내고, 딩가딩가 울리기 시작했다. 기념일에 무감각한 형도 새해에는 감수성이 올라오나보다.
어머니는 한살 더 먹는게 싫다고 하신다. 여자의 나이는 좀 치명적이긴 할 거 같아서 짧게 위로해드렸다. 그만큼 나도 나이가 먹어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좋은 거 아니겠냐며 말이다.
오늘은 조금 씁쓸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 너무 설레발을 친 자의 말로겠지. 그녀와 계속 이어오던 대화가 단절된 듯 하다. 뭐 어쩌겠나. 꽤나 부담스러웠겠지. 내 삶은 거절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익숙하다.
1월 1일을 제대로 기억하는 건, 올해가 처음인 거 같다. 여태까지 난 항상 이벤트에 해당하는 날을 의도적으로 더 혐오했다. 아마 방어기제였던 거 같긴 한데, 기념일에 아무것도 하지못하는 내가 싫어서 더 이 악물고 무시했었다. 지금은 어떤 감정의 얽힘이나 꼬인게 없어서, 그냥 그 당시의 내가 불쌍할 뿐이다.
내일도 출근이다. 이러다가 쉬지않고, 일만 하다가 죽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돈이나 더 벌다가 죽어야지.
오늘의 담배는 유난히 썼다. 사실 난 진득하니 혼자 술 담배를 하고 싶은데 가족들은 그런 내 모습이 싫은지, 자꾸 같이 마시자고 한다. 물론 그런 걸 튕길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기에 그냥 같이 화기애애하게 마시고 피웠다.
내 공간이 필요했다. 가족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혼자있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난 군중 속의 고독처럼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럴 바엔 혼자있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게 내가 독립을 원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리고 남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것도 지쳤다.
남이 먹은 설거지와 남의 방까지 청소해주며 살 정도의 여유는 없다. 그런데도 이 짓을 2년 반 동안 해줬으니, 이제는 좀 해방되고 싶다.
가족들 모두 나의 노고를 인정하고, 미안해하기에 화를 내거나 싫다는 티는 내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과는 다르게 더 높은 레벨의 사람이라며, 날 치켜세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내가 높은게 아니라, 그들이 낮은 상태라고 생각해서이다. 난 아주 노멀한 사람이고, 주에 한번씩 청소나 빨래, 설거지를 하는 정도는 인간이라면 응당 해야된다고 본다.
내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게 아니다. 넘어지고 나서 앉아 울거나, 다 포기하고 누워버리는게 싫다. 어머니를 제외한 내 가족은 그런 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난 그들을 반면교사 삼아왔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도 또 집안일을 하려니 사실 좀 빡친다. 이게 내가 독립하고 싶은 세부적인 이유다.
제발 날 혼자두었으면 좋겠다. 17살부터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뒷수습'이었던 거 같다. 둘째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 빼고는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하다가 맨날 끝났다.
가족들이 언제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 부분이겠지. 하하 나도 쌓인게 많았나보다, 왠만하면 주위 사람들 욕은 하고 싶지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네.
모든 걸 혼자서 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다 노력했겠지. 그러나 적어도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에게서 생겼다는 건 그들도 인정하는 바이니, 이정도면 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본다.
비록 그들이 싫어질 정도로 내 마음을 다 써버린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내 가족한테는 언제나 애증이 있다.
증오는 내려두고, 사랑만 남기기 위해 그들을 떠나려 한다.
외롭지는 않다. 그저 내 능력이 닿는대로 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