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서만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다.
형편 때문에? 동네가 시골이긴 해도 2층짜리 주택에 살아온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계속 같이 그림을 그려 온 '언니와 나, 둘 중에 한 명만 예고를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라는 말은 내가 예고와 예대를 졸업하고도 몇 년이 지나서 듣게 된 얘기였다.
중학생 때 다니던 미술학원 선생님과 상담을 마친 엄마는, 모두가 잠든 밤에 언니만 불러놓고, "네가 공부는 잘하니까, 일반 고등학교로 가서 그림 다음으로 좋아하고 관심 있는 걸로 대학을 준비해 보자."고 선택권 자체가 없는 그런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언니는 두 살 터울인 나한테 단 한마디도, 일말의 내색도 없이 일반고에서 공부하고 부산에 있는 전문 대학교로 가서 한복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부모 다음으로 어른스러운 무게를 짊어지고 선택할 기회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하는 첫째들은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그런 이유에서 왠지 나도 억울하다.
선택권은 내게도 없었다. 어쩌면 시기와 미움 대상이었는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지난 일이라며 꺼낸 그 얘기에 내가 미안해하라는 거든 고마워하라는 거든 열심히 하라는 거든 다 싫다.
나는 나대로 지금까지 먹고살기 박한 이놈의 창작 따위로 결실을 맺어보겠다고, 압박감을 안고 바둥바둥 스스로를 괴롭히며, 버티고 있는 고작 프리랜서로의 삶을 살고 있노라면.
어쨌거나 나는 반 친구들의 부러움과 응원 속에, 정말 아무 고민도 갈등도 없이 아주 편한 마음으로 예고 실기시험을 치르러 갔다.
(*이전 이야기는 [내가 그리는 그림 인생_열여섯까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보다도 긴장한 반 친구가 아침에 청심환을 챙겨 주기도 했다.
배정되어 들어간 실기 실 가운데는 원형 테이블과 그 위에 과일, 야채, 항아리 등 정물이 놓여있었고, 평소 학원에서 해 온 대로 형식적이고 안정적인 삼각구도로 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그림을 깔끔하게 완성하고 나왔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의심은 1%도 없었다. 다른 학생들의 그림도 슬쩍 훑어보고는 오만이 꽤 섞인 자신감으로 나 정도면 당연히 될 거라고 확신했다.
차분한 나 대신 친구들이 교실 TV로 컴퓨터를 연결해, 나의 예고 입학 최종 결과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귀여울 정도의 호들갑스러움이 섞인 따뜻한 분위기의 시골학교 교실이었다.
나의 어림짐작에 이변 없이 당연하게 합격 결과가 떴고, 반 친구들이 더 기뻐하며 다 같이 축하해 주었고, 그중 몇 명은 나와 떨어져 고등학교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따뜻한 온도 속에 섞여 미소 짓고 있던 나의 온도는 미안하게도 달랐다.
'해방, 드디어 해방이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나는구나. 속에 있는 답답한 것들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꺼내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실력이 비등한 곳에서 평가 다운 평가를 받고 경쟁할 수 있겠구나.
내가 진작 있어야 했던 곳으로 가겠구나.' 생각했다.
유년 시절부터 굳혀진 말수가 없고 얌전한 낙인 된 이미지가 쭉 이어져서, 좋아하던 친구에게 한걸음 다가가기 위해 학용품 하나만 빌려도, 주변 환호와 함께 떠들썩한 분위기로 결국 친해지지도 못했고, 목소리 높여 말하고 웃고 화내고 그 어떤 시도와 행동도 평소와 다르다는 이유로 표현하지 못하고 참아야 되는 게 불편했다. 내 속과 다른 착하고 얌전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다.
숨이 트이는 희망찬 기분과 제대로 실력을 겨루어볼 첫걸음이 기대되었다.
그동안 뭐가 그렇게 날 억압했는지, 나는 도대체 뭘 표출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부푼 기대는 예고 첫날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릴 것 같은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대범하고 유별난 친구들이 많았고 활발하다는 표현으로 포장하면 금세 뚫고 나올 정도로 굉장히 어수선했다.
미술이나 공부에 큰 관심이 없고, 흔히 말하는 좀 노는 애들, 집안이 나쁘지 않은 친구들이 예고로 많이 온 듯했다. 미술 학원을 다니고 공들여 실기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예고의 첫 실기 시간 치고는 원 하나도 못 그리는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원이 아닌 삐뚤빼뚤 동그라미. 저건.. 감자를 그린 것일까?
종이가 너덜거릴 정도로, 검은색을 덧칠한 항아리의 획기적임에 내 예고 생활의 기대감은 와르르 무너졌다. 물론 전교생의 시선을 강탈하는 유독 튀는 친구의 그림이긴 했지만, 내 예고의 첫인상은 그 친구다.
새로 오셨다는 서양화 수업의 남자 선생님은 소문대로 까르르 웃는 예쁜 친구들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그 말에 괜한 오기가 생겨 내 그림을 잠깐 봐주시던 선생님한테 내 이름을 아시냐고 여쭤봤다.
당황한 선생님은 미안해하며 내 이름을 물어보셨고, 그 계기로 선생님과는 친해졌다.
타지에 있던 예고를 다니면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아침이면 2층 침대 머리맡에 켜진 스피커의 울림에 짜증 섞인 탄성을 뱉고는 몸을 일으켜, 잠이 덜 깬 상태로 운동장을 뛰어야 했고, 샤워 실은 줄을 서서 대기하고, 5분 만에 씻어야 했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가방을 먼저 교실에 두고 와서 교복을 챙겨 입기도 했다. 자기 전에는 방마다 점호를 했다. 시내는 버스로 40분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대부분 학교와 기숙사가 동선이 다였다.
1학년 때는 소묘, 서양화, 동양화, 조소, 디자인 등을 배우며 전공을 정하기 위한 실기시험이 따로 있었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점수에 반영되는 정밀묘사 시험이 주기적으로 있었다. 종이컵, 캔, 박카스 병, 우유팩 등. 하던 만큼만 해도 상위권에 들었고, 집중해서 그리면 1등을 하기도 했지만, 교실에 반 정도는 그림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1등을 해도 큰 감흥이 없었다. 나뭇잎 정밀묘사에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7등까지 떨어지자, 점수를 매긴 선생님께 손에 들고 그린 거라 그림자가 없는 거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제 와서의 생각이지만 엄지와 검지만 살짝 그렸더라면, 기발함을 보너스로 아마도 1등을 했을 터인데ㅎ) 나에게는 딱 그 정도의 열정만 있을 뿐, 더 높은 단계의 '그림의 길'로 함께 할 선의의 경쟁자를 찾지 못해서인지 그림에 대한 흥미는 갈 곳을 잃고 붕 떠다녔다.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대학교에서 굉장히 높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갈 수 있냐는 즉흥 시험에 손을 들고 올라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 학교에서 유일하게 그 대학교에 붙은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그 말에 나는 두근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그 학교, 한국예술 종합학교에 가고 싶다고 뜬구름 잡듯 말했고, 선생님은 터무니없단 듯 3학년이 되면 현실적으로 생각이 바뀔 거라 하셨다.
실기 선생님께는 쟝미 쉘 바스키아가 되고 싶다고 말했더니, 마약 중독으로 죽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정말이지, 88년도에 세상을 떠난 바스키아가 88년생인 나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 믿고 싶었다.
물론, 그가 사망하기 한참 전에 내가 태어나버린 오류가 발생했고, 만약 나로 태어났다면 전생에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없었겠지ㅎ
예고에 다니면서 그림에 대한 내 작은 불씨는 하찮게 꺼져갔다.
수업 외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만화 동아리에도 들었지만, 선배, 후배, 친구들, 모두가 유치한 장난을 치며 노는데 정신이 팔렸고, 나 또한 그 속에 휘둘렸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볼 줄 알고 현명했다면 좋았을 텐데, 휘둘리기에 적합한 나약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실망한 만큼, 그림에 진지해 내게 다가왔던 친구도 놀고 있는 내 모습에 실망했는지 사이를 좁힐 수 없었다. 결석이 잦았던 그 친구는 원룸에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느라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말도 와닿지 않고 영향을 받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내 그림에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흥미도 없었다. 시험 치는 서너 시간 정도만 신경 써서 그리는 게 다였지만, 그럼에도 2학년 서양화 전공으로 1, 2등을 번갈아가며 차지했다.
서양화 선생님이 바뀐 후부터 점수가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스타일이 달라서 그럴 수 있지'라고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듯 침묵 속 붓이 흡수한 물을 털어내는 소리만이 전부였던 숨 막히는 서양화실, 생각에 잠겨 붓 터치를 얹고 있던 수업시간.
“거기 분홍색을 칠하면 어떡해?!” 텐션 높은 갑작스러운 선생님 말씀에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도 내 그림에 대해 그런 반응을 한 적이 없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창피하게도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철컹 놀라는 편이다. 넋 놓고 방심한 내가 그냥 너무 놀랐던 것이다.
호탕한 말씨로 다그치듯 왜 우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심적으로 쫄아서, 그리고 민망해서 나는 그만, 애니메이션으로 전과를 고민하는 중이라고 순발력 있게 뻥을 쳤다.
진지하고 차분한 내 얼굴로 뱉은 말이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자, 10년 뒤 애니메이션이 뜰 거라는 소식을 위안 삼아, 우리나라에서 서양화는 안 된다는 1학년 때 친해진 남자 서양화 선생님의 현실적인 상담에 더해, 대학 비를 내고 애니메이션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는 게, 서양화 실력을 쌓는 것보다 가성비 있다고 판단되어, 진짜 애니메이션과로 전공을 바꿔버렸다. 그렇게 전향한 애니메이션과는 침묵의 서양화과와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화기애애하고 귀여웠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비교적 좋아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주제로 상황을 상상해 그리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오로지 그림 실력만이 아닌, 스토리 재치에 따라 등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다른 친구들의 상상과 아이디어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으며, 서양화를 전공했던 게 기반이 되어 중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고를 다니면서 왕따를 당하고, 연애를 하고, 집안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이런저런 감정에 휩쓸려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가물가물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방황하며 많이 걸었고 많이 울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실기 실에 자주 엎드려 있었고, 야간 자율학습에 빠진 반 애들을 찾으러 다니며, 실기 실 문을 연 담임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혼자 이젤 앞에 넋 놓고 앉아있던 나를 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가신 게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3학년 어느 날 결심했다. 멀리 도망가기로.
외국... 그전에 서울, 경기. 그중에서도 단지 붙기 어려운 만큼 지원하려는 친구들이 없어 보여서 택한, 잊고 있었던 한예종에 가야겠다고. 한예종이라면, 가족과 예고의 모든 친구들과 인연을 끊고 인생을 아예 새로 시작해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고. 일단 처음은 떨어질 것도 감안하고 1차 시험만 쳐 봐야겠다고 단단하게 마음을 먹은 이후로는, 나를 숨겨 적당히 가식적인 거리로 트러블 없이 지냈다.
전봇대에 대학생이 붙인 A4용지의 영어 과외 구인 종이를 뜯어 엄마한테 내밀었다.
눈높이는 책장 뒤로 넘기고, 다락방에 숨기고,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면 부엌 어딘가에 쪼그려 숨었던 내가 영어 과외를 받고 싶다고 하다니, 엄마는 당황하면서, 벌이가 부족했음에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한예종에서 실기시험과 함께 국어와 영어점수를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언어 영역은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 과목이 국어여서 솔직하게는 꼬투리를 잡힌다거나 하는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 꾸준히 공부했던 과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영어 과외, 자취하는 대학생 선생님은 고3에 이 정도 실력인 학생을 본 적이 없었나 보다.
성적은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신 거 같았지만, 용돈벌이에는 꿀 과외 였을 것이다. 자취방에 놀러 온 선생님의 여자 친구가 해주는 간식을 먹으며, 최소한 영어시험을 잘 찍을 수 있는 장문에'but'이나 'because'에 세모를 치며, 아주 기본적인 노하우로 객관식을 잘 찍을 수 있을 수 있는 맞춤 과외를 해주셨다.
그렇게 결국 그토록 원하던 한예종에 붙어 그동안의 인연을 끊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면, 혼자 잘난 줄 알며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원서비 입금 마감 날 밤 11시 58분... 물론, 잘못된 기억 일 수 있지만, 심적으로는 그랬다.
1차 시험 원서 지원을 넣고 모든 게 끝난 듯 개운한 마음으로 까마득하게 잊었던 원서 입금을 그 늦은 시간, 당시 엄마와 지냈던 조그만 한 원룸의 현관문을 열고, 엄마 얼굴을 마주친 순간 번뜩 떠올랐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벼락같이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의 번뜩 함으로 소름 끼치도록 소름이 끼쳤다. 1차 시험 원서 지원의 마무리를 정말 어처구니없이 놓쳐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냐며 달려 나왔고, 모든 인연을 끊을 나의 어마어마한 새 인생 계획이 무너져 다 끝나버렸다고 좌절하고 있는 와중에, 엄마는 나를 차를 태워 근처 ATM 기계로 가 입금을 시도했다. 물론 실패, 다음날 아침 9시에 원서접수처로 전화를 해보자는 해결 방법이 전부였고, 좁은 원룸에서 엄마와 등을 돌려 누운 채 숨죽여 울며 한 시도 잠에 들지 못했다.
아침잠이 많아서 담임선생님의 전화로 눈뜨면, 치과에 들렸다가 등교를 한다고 뻥을 치고 다시 잠드는 학생이 나인데, 그날은 날이 밝자마자 부운 눈으로 집을 나섰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교실로 가지 않고, 빈 실기 실에서 9시만 기다렸다가 원서 접수처와 통화했다.
안 되는 거 아는데... 정말 안 될까요? 참으로 구차한 애원이었다.
그렇게 절묘한 일정, 시간 동안 새하얗게 잊을 수 있나? 그때 하필 번뜩 떠오를 건 뭐람?
나는 아무래도 내가 너무 독하게 못된 마음을 먹어서 처참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융통성도 현실성도 부족한 편이라, 다른 학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특히나 많은 친구들이 지원 한 학교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학벌이나 과보다도 인연을 끊는 게 내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한마디로 다른 학교 맞춤 실기시험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이성적인 뇌는 고장 났고, 그저 절망에만 빠져있었다.
불이 꺼져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어둡고 고독한 분위기의 실기 실에 눈이 부운 상심한 내가 앉아있을 때였다. 장난 기가 다분한 학생으로 알고 있던 애니메이션과 두 선생님이 어디선가 내 상황을 듣고 와서는 나를 위로했다. 위로라기 보다 분주한 다른 학생들을 뒤로하고, 나 혼자 있던 실기 실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측은한 미소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뭔가 다음 계획을 고민하는 듯 보였다.
혼이 나간 나를 대신해 이성적인 뇌를 써주는 것이 느껴져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다음날인가? 고민 끝에 애니메이션과 선생님이 일단은 스토리보드 시험을 준비하자고 제안하셨다.
그게 시험 날까지 5일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는데,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믿고 따랐다. 그게 최선이니까.
예고 3년을 다니면서 해온 방식들은 재껴 두고, 그림은 기본기가 탄탄한 편이었으니,
아이디어나 어떻게 스토리를 전개하고 편집할지 연출에만 신경 썼다.
단 5일 동안 스토리보드 형식으로 1 대 1 혹독한 평가 속에 하루 1장, 총 5장 만을 완성시키고, 대학에 덜컥 합격했다. 시험이 끝난 후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5일간 혹독한 평과 뒤에서, 매일 빠르게 습득하고 늘고 있다는 칭찬을 하셨다고 전해 듣고, 기쁨의 안도감이 들었다.
시험은 늘 벼락치기였지만, 다른 말로 간절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 곳에 합격을 하고 나서야 오히려 내가 붙은 학교가 어디인지 현실을 자각했고, 친구들이 많이 붙은 이 학교를 다닐지 재수를 준비할지 그때부터 속앓이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동시에 집에서도 벗어나는 게 내 목표였어서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심리적으로 하루빨리, 아주 멀리 떠나야 했다. 당시 나에게는 나의 집, 나의 가정은 지옥이었다.
학교가 어디냐가 무슨 상관이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되지. 떠밀려 가는 학교였지만, 정신이 또렷해졌다. 내성적인 이미지에 답답했던 중학생 때와는 다른, 다사다난하고 감정적이었던 고등학생 때와는 또 다른 새 삶을 원했다. 말 그대로 살아온 인생을 리셋 하고 싶었다.
간절히 바란 대로 먼 곳, 학교는 경기도 권에 위치했는데, 유감스럽게도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새 인생을 살고 싶었던 만큼 밝고 활발한 이미지로 대학 생활을 시작해 반 임원도 맡고 곧잘 지냈으나, 이미지메이킹이 잘 된 만큼 이전 이상의 에너지가 버거워 지쳐갔고,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파고들었던 친구들과의 괴리감도 이유가 되겠으며, 꼬여버린 연애사도 수습이 불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학비가 부모님으로부터 메워진 게 아니라는 말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다.
한밤중 캠퍼스를 방황하다, 나한테 유일하게 침착한 어른 같았던 언니한테 전화해 학교를 다닐 수 없겠다고 말했고, 언니는 내게 휴학을 제안했다. 기숙사 짐들을 정리해 택배로 보내고, 원래 있던 곳으로 가기 위해 캠퍼스 버스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마음을 정리하던 그날의 기억.
여기까지가 스무 살이 되기까지 나의 그림 인생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