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의 안부
글을 쓰는 일, 기록을 꿈꾸는 일.
몇 년째 잡고 있는 꿈이자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는데-
장기간의 연애를 마감하고 휘청대면서 꾸역꾸역 이어오던 오랜 직장에서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겨우 오른 계단에서 단번에 내려왔을 때. 다시 올라갔다가 같은 고통을 마주하면 어떡하지?
정말 하고 싶었던 다른 길로 간다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어떻게든 해낸 사람이 되어야만 해서, 에세이 한 권을 목표로 책상에 앉아 지내다가, 시나리오 제출 공고를 보고 얼른 노선을 갈아탔다.
나는 간절했다. 그게 재작년 12월쯤이다.
구석에 처박아둔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도대체 엉망이라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내가 성장했음을 깨달았고, 욕심 가득한 이 대작(大作)은 지금의 나로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 일부 몽타주 과거 신을 빼내어
작년 1월, 한 달 정도 푸석푸석한 식사를 하며 -
첫째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못된 인간들의 식칼과도 같은 말들을 되뇌며 '두고 보자'라고 동기부여를 만들었고, 둘째, 이불속에서 하루를 버리게 만드는 무겁고도 따뜻한, 분명 나를 사랑했던 그의 모습이 내가 만든 환상이 아니라고 속을 때면, 따갑도록 차갑고 그저 가벼운 마지막 그의 모습이 현실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셋째는 내 안에 떠올린 이미지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정성을 찾고, 나를 믿는 유일한 내가 되어, 결과 시뮬레이션에 물음표 대신 느낌표를 달아 이전과 다른 장르의 시나리오 하나를 짧은 기간에 써 내려갔다. 말없이 집중하던 그 과정이 1차적으로 충분히 행복을 안겨주었다.
상반기 하반기 두 번의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결과는 예상대로 였지만, 수정을 거쳐 지난가을,
난생처음 시나리오 저작권 등록을 하면서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고, 조심스레 두 군데 작은 제작사의 문을 두드려보았다. 고작 두 군데였음에도 한 군데로부터 재밌게 술술 읽었다며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1월까지 세 번의 미팅과 함께 조금 더 뚜렷한 수정본이 만들어졌고, 내가 만든 캐릭터가 선명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만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후 3번째 시도인 제작지원사업 신청에 일부 자격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작지만 큰 숙제를 해내기 위해 가지고 있던 소스로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조금은 급하게 만들어 지원서를 냈다.
물론, 이 숙제는 두고 봐야 되지만 사실 부족한 게 뭔지, 앞으로 갈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날과는 비교할 수 없게 꿈에 다가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알아야 할 시스템 외
글을 쓰는 것 자체의 재미와 이제야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끊임없이 진로 고민을 하던 정답이 아닐지도 모를 변두리에 쌓아 올리던 담과, 나보다 중요하지 않은 남을 좋아하며 반짝이던 날들에서 벗어나, 비로소 내 자리에 섰다고 생각이 드는데, 조금 씁쓸하고 아쉽게도,
나의 집중을 예민함과 괴로움으로 보며 스스로를 그만 괴롭히라고 한다. 쉬라고 한다.
또는 경력이 아깝다며 해온 일에 복귀하라고, 돈버는 일을 하라고 한다. 가끔은 연애라도 하라고 한다.
기분전환으로 맛있는 걸 먹자고 한다. 빨리 괜찮은 청약을 넣어보라고, 그렇게 비싸지 않으니 중고차로 시작하라고 한다. 안정적이고 어른스러운 삶에 대해 말한다. 내 인생을 철들지 않은 불안한 삶으로 본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며 차종을 추천해주는 친구의 안정적이고 여유 있는 삶을 보면서, 나는 내가 저 길로 갔어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 갈증을 느낄 거라는 것을 안다.
나는 줄 곧 안정적인 어른의 삶을 거부해왔고, 내 선택에 후회가 없다. 내가 하는 일로 수입이 없을까 봐, 아파트를 사지 못할까 봐 불안한 적은 없었다.
물론,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한 적은 있지만, 내가 잘못해서 빚을 낸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항상 나를 대신해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나의 가장 큰 불안은 돈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면 어떡하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지금까지 해온 게, 꿈꾸고 품어오던 게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질까 봐.
나는 차를 살 돈으로 책을 내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전시회도 좋다.
아주 쉽게 '그럼 해.' 하겠지만 그러고 있는 과정이다. 그게 나에게 안정을 줄 삶이다.
누군가와 행복한 과정을 나누고 대화하고 싶은데, 말을 꺼내기 무섭게 분위기가 가라앉고, 결과만 기대하고 오가는 안부 속에 나를 안타까워하며 '하나만 잡고 있지 말고, 팔릴 만한 재밌는 다른 걸 써봐.' '힘든 길이야.'라고 내 시나리오에 어떤 얘기가 담긴 건지 관심도 없고, 어떻게 수정되어가는지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별로라고 생각하며 내 길에는 마치 작은 불씨도 없이 이미 끝난 듯 말하는 측근의 말들에, 정말 오로지 나 혼자 달리는 외로운 마라톤이 시작되는 거구나 생각이 든다. 미련이 아니라, 이제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었을 뿐이고, 퇴고와 성장,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