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유진 소설_시간의 흐름,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작은 책에 빼곡하게 적힌 활자, 그 활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가끔은 활자 중독은 아닌지 의심이 들 만큼 뭔가를 읽어내는 것을 참 좋아하는 나여서 이번 책은 그런 마음에 충족을 준 책이다. 아마 소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신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때부턴가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소파에 벌러덩 누워 소설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일상이 쉼 마냥 느껴졌다. 마음을 한 껏 늘려 쉴 때, 그때 함께 한 소설이 이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 '페른베'는 독일어로 먼 곳을 향한 동경, 먼 데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 참 낯선 단어이지만, '페른베'라고 발음하면서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나에 대한 그리움이 일렁이었다. 소설은 전화상담원 '희수'의 계절을 다루고 있다. 엄마에게 있어 '실수'이자, '지켜낸 아이'인 희수의 삶은 '우아하고 완벽한 곡선'이란 글방을 통해 자신을 조금씩 들여다보고,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엄마를 이해하는 시간으로 걸어간다. 주인공 희수에게 계속 마음이, 눈길이 가는 소설이다.
1. 우아하고 완벽한 곡선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떠오르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뮌헨의 눈 오는 거리를 화면을 통해 바라보는 여자와 남자,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그러다 문득 내가 옮겨 적은 기억이 실제로 내가 겪은 것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내가 꺼낸 것은 다시 쓰기에 가까웠다. 나는 내가 겪은 그 혼란의 시간을 들려줄 만한, 보여줄 만한,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바꾸고 있었다. 이야기 속의 나도 완전히 나는 아니었다. 책 속의 그 여자도 그랬을까? 레몬빛 가스등을 바라보던 그녀도 그 글을 쓰는 순간 자기 안에서 되살아나고 또 지워지는 무언가를 느꼈을까? (64쪽)
희수는 김밥집에서 발견한 광고를 보고 지역 청년 모임 중의 하나인 '우아하고 완벽한 곡선'이라는 이름의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희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극단은 어디일까? 극단은 먼 곳,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곳이다'라는 질문을 가지고.
희수는 애인과 함께 떠났던 해남 여행을 떠올리며, 소설을 썼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향한 그리움으로 서로의 시간을 아까워한 사이였는데, 어느새 피로한 얼굴로 서로를 보는 사이로 변해 이별한 애인과의 이야기. 희수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 안에서 되살아나고 또 지워지는 무언가를 느꼈다.
글쓰기가 암울한 어떤 시기의 위로가 될 수 있다고들 한다. 우울한 마음과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 가운데 글쓰기가 자신을 구원해주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어떤 순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일기나 메모를 잘해왔고, 뭐든 기록하고, 그 기록된 것을 꾸미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긴 하다. 막연히 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글쓰기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학창 시절 글쓰기 대회에도 나가 상을 받기도 해서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하는 건 정해진 과정 같았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글쓰기가 밥벌이는 될 수 없지만, 내 삶 속에 일상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감정이 혼란스러운 날, 일기를 쓰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일기인데도 온전히 감정을 내 보이지 못했다. 적당히 숨기는 감정, 오히려 나는 그런 숨김이 내 감정을 적정 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 읽을 땐 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글을 쓰면서 정리할 수 있었다. 글쓰기는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도 되어 주었다. 그래, 정말 글쓰기의 힘이다. 소설 속 희수가 느꼈던 무언가가 어쩌면 관계에서 소외되었던 자신을 향한 회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일
어떤 날은 뭐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요. 이 거리도, 나도 다 가짜 같아요. 진짜는 과거에, 저 벽 속에 있고요. 나는요, 삶이 비처럼 내릴 때 그 빗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게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인지, 한때 나였던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날에는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저 벽에 적힌 이름인 것 같아요. 당신이 보는 나는 그 사람이 아니고.
변했다는 뜻인가요?
사는 게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일 같다는 뜻이에요.
니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니나의 눈가에서 시간의 흔적을 봤다. 파도가 쓸고 간 흔적이나 무너지고 팬 흔적 같은 것, 포만과 반복, 탄력 상실 그런 것들을 반복한 존재의 느린 변신 같은 것. 어느 날, 우리는 모두 생각해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걸 나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하며, 그냥 나라고 부르자고 체념하며 살기도 한다. (73쪽)
마음에 오래 남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이다. 니나는 '우아하고 완벽한 곡선' 글방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며, 희수와 함께 하나의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다.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청년들이 오래된 상가를 지원받아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 사업이 한때 유행하였다. 예쁜 편집샵이나 상가를 볼 때면,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지방에 놀러 가면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다. 이 소설 속에 그런 일을 하는 청년들이 많이 나온다. 카페 '시월'을 운영하는 승호, 글방지기인 니나. 니나는 서울에서도 살고 독일에서도 살았지만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 니나의 고백. '사는 게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일 같아요.'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나는 20대 청년의 시절보다 지금의 시간이 더 좋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기분이 들어서. 젊었을 때에는 뭔가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도는 기분이 들었었다. 일찍 결혼을 하고, 일찍 아이를 낳고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안정적이지 않은 느낌. 지금도 노후에 대한 완전한 대비가 되어 있다거나,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것 같긴 하다.
삶의 여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또 누군가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나였다가 나 아니었다가 다시 나인 시간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과 비슷한 구절을 소설에서 발견해서, 놀라웠다. 젊었을 때의 용기와 도전은 나이가 들수록 비겁해지고 희미해진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멀어진 순간에 다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낸다. 그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나'임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정리
니나가 우아하고 완벽한 곡선의 문을 열자 전희수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전희수가 머리를 잘랐다. 엄청 짧게. 창가에서부터 번지는 여름의 빛이 희수를 환하게 감쌌다. 희수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초여름의 빛과 색을 닮았다. 가져본 적 없으나 그리워하게 되는 환한 여름의 그것. 나는 희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102쪽)
어릴 때 저 안에 있으면 낚시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가만히 앉아서 예쁜 소리를 낚아 올리는 거죠. 손님이 들어올 때 띠링, 종이 울리는 소리,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 바람 소리, 어떤 때는 빛도 소리를 내요.(132쪽)
참 좋은 구절이 많아 책에 포스트잍을 잔뜩 붙였다. 읽으면서 실수가 아니라 지켜낸 아이였던 희수의 삶과 길에 대하여 생각했으며, 철없는 엄마 동이씨에 대하여 생각했다. 다시 돌아와 방황하면서도 나를 찾아가는 승호와 니나의 삶도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득한 그리움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페른베. 무엇을 향한 그리움인지 모를 마음, 페른베를 책을 읽으면서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닮고 싶은 사람도 발견했다. 주인공 희수와 이름이 같은 젊은이, 전희수. 초여름의 빛과 색을 닮은 사람, 비슷한 환경과 공간에서 생활하더라도 예쁜 소리를 낚아 올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소설 속 니나의 고백처럼 '조금 더 나은 나'가 되고 싶은 마음처럼.
주인공 희수는 글쓰기를 통해 실금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을 파고드는 욕망을 발견한다. '다시 쓰고 싶다'라는 욕망. 그 욕망이 희수를 어떤 계절의 어떤 모습으로 데리고 갈지 궁금해졌다. 소설 속 인물 한 명, 한 명 가만히 지켜보고 싶은 소설이었다. 참 좋다. 이 책.
[이야기 나눠 보기]
1) 자신의 마음 가운데 실금처럼 자신을 파고드는 욕망이 있나요? 어떤 것을 향한 욕망이며, 나는 그 삶에 얼마큼 가까이 다가갔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언제인지,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