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클럽문학동네 # 이달책 5호_김봄 소설_문학동네
이번 북클럽 문학동네의 ‘이달책’은 김봄 작가님의 ‘라디오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이다. 잘 알지 못하는 작가님이었고, 작가님의 단편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책을 선택하는 데 설렘이 앞섰다. 노란 아이스크림이 낡은 아파트 위에 쏟아진 감각적인 표지는, 그 자체로 상상력을 자극했다. 책 소개를 찾아보니, 1996년대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북클럽 문학동네의 이달책 키트로 함께 온 작가님의 편지, 여름에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과 비슷한 작가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1. 뱀이 쫓아온다.
불길하게 굴지 마라.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부터 이 집의 불운에 불이 붙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 그을린 자국을 따라가 보아도 발화점은커녕 타다 남은 재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화재로 무너진 터를 황망히 바라보는 사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 실감할 뿐이었다. (246쪽)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불행을 옮겨 들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장의 씰룩거리는 걸음걸이에 따라 병 속의 뱀이 꿈틀댔다. 술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세월이 지나도 쪼그라들거나 몸집을 부풀리지 않고 병에 꼭 맞게 들어찬 뱀이 조금씩 움직였다. 뱀이 멀어진다.
뱀이 나를 쳐다본다. (275쪽)
책에는 전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뱀이 쫓아온다’는 몇몇 장면들로 나를 단숨에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책 속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그리고 엄마와 나의 대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마저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 봐 두려웠던 어린 시절 과거의 나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불운에 대한 이야기.
주인공 ‘나’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불운 가운데, ‘뱀술’이 있다고 믿는다. 할아버지가 잡아 담근 뱀술, 술병 속에 뱀이 살아있을 거라는 어떤 믿음과 두려움.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집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란스럽고 불행한 일들의 원인이었으며 시작이었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 치매 걸린 할머니, 그리고 교묘히 엄마를 괴롭히는 고모까지.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산소에 갔다가 삼촌이 뱀에 물려 온 식구가 삼촌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갈 때, 엄마와 자신만이 뒤쳐져 버려진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마저 자신을 버릴까 봐, 또 엄마가 자신을 비롯해 온 가족을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 술병 속에 담긴 뱀이 어린 시절 ‘나’에겐 자신을 쫓아오는 피할 수 없는 어떤 불행처럼 느껴졌나 보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본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시어머니, 조그만 구멍가게, 그리고 철길 가의 주택.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께 남겨진 사람과 집. 그래도 엄마는 그 집과 사람을 잘 지켜내셨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치매에 걸리셔서, 살아계신 내내, 식사를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다고 소리소리 지르시는 날들이 이어졌고, 나중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무덤을 쓰는 일로 고모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셨다.
나이가 들수록, 그 시절 엄마의 견딤이 느껴져 마음이 아려온다. 그 시절 엄마의 나이를 넘어서 나는 늙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가 겪었던 그 시절의 시집살이와 이야기들은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소설 속 ‘나’는 결혼을 하고 집을 옮기면서 엄마에게 받아 온 술을 이삿짐업체 소장에게 넘긴다. 그러면서 불행인 줄 모른 채 술병을 옮겨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을 다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치매 걸린 할머니와 과부 엄마, 우리 집만의 특별한 어떤 모습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소설 속에 담겨 있어 마음이 묘했다. 어쩌면 그 시절을 견뎌온 사람들이 만들어 낸 지금의 모습은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히 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게, 진정한 삶의 모습 같다.
2. 안개가 시작된다.
나는 그 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명절에 할머니 집에 가지 않고 남았다. (중략) 언니가 설득을 포기하고 떠나고 나면, 나는 이모도 언니도 없는 빈집에서 기다렸다.
기다렸다. 나는 그 말을 뱉어놓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기다렸단 말인가? 언니와 이모가 돌아오기를? 그 집에서 나가는 날을? 아니면 그 집에 영원히 머물기를 기다렸나?
아직까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언니도 이모도 이모부도 없는 그 집에서 잠자코 기다렸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홀로. (287쪽)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 같지는 않다. 그게 겉으로 티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평소에 나는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한다는 것이다. 언니 집에서 지내기 시작한 열한 살 무려부터 쭉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크고 작은 불화는 있었을지언정 나름대로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몇 번의 연애를 하고, 원치 않는 임신 가능성에 겁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두와 거리를 유지하고, 좁히고, 멀어지는 법을 배웠다. 그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차차 읽힌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았다.(321쪽)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았던 작품은 ‘안개가 시작된다’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주인공 ‘새벽’의 삶이 내내 마음에 걸려 오래 생각했던 소설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함께 아무도 자신을 키우지 않겠다고 하여 이모 집에서 자란 아이, 새벽. 이모의 딸인 사촌 언니가 죽고 난 다음, 조카인 슬기, 형부 원규와 함께 이모 집을 내려가는 사람. 그리고 형부를 사랑하는.
소설에 인용된 동화책의 제목이 ‘안개가 시작된다’이다. 태어날 때부터 붉은 실이 새겨진 아이가 그 실을 풀어주는 사람을 찾아 여행을 하는 이야기, 실을 풀어주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지만 그 실을 가려주는 안개 자욱한 숲으로 걸어가는 이야기.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인 ‘새벽’이 사촌언니의 남편인 원규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을 손 흔드는 것만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부모의 이혼, 버려짐, 이모집에서 자라는 순간 느끼는 알 수 없는 기다림들이 새벽의 성장 가운데 늘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새벽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엇나가거나 삐뚤어진 않았다. 잘 자랐다. 마치 처음부터 타고 태어난 것처럼.
부모의 이혼이 자식에게 미치는 삶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른 남자의 보살핌이 나에겐 결핍이었기에 결혼을 일찍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지만 사회생활을 통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도 잘 안다. 살아오면서 생긴 어떤 상처와 상흔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순 없지만, 그걸 가려주는 사람을, 상황을 만나 자신의 상처와 상흔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새벽이 원규를 사랑하는 것, 그 상황들이 모두 어쩌면 조금은 불편한 지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새벽이 걸어가는 안갯속에 원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3. 정리.
책을 처음 펼쳤을 때에는 속도감 있게 읽어가지 못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왜 이런 거지?, 의문을 가지며 이야기를 따라갔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몰입도가 높아지는 책이었다. 1990년대의 어떤 가정의 모습, 소개팅을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과거 어느 시점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내 곁에 있었던 참 속을 알 수 없었던 친구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관계가 참으로 단출한 내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느꼈던 그 부담감도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현재. 그 시절을 지나 온 우리가 살아갈 일상의 모습에 대하여 나는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더디게 생각해 본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과거 가족과의 일화를 떠올려 봅시다.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가족의 모습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며, 무엇인지 이이기를 나눠 봅시다.
2) 나에게 나의 상처와 상흔을 가려줄 ‘안개’가 필요한 순간은 언제이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bookclub_munh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