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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Oct 24. 2022

책들의 시간 7_주체적 사랑의 시작과 책임감에 대하여.

#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민음사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사랑과 이별과 불륜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고 옆자리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추천해주신 책이 바로 ‘인생의 베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미 결혼을 한 지 이십여 년이 넘었고, 밋밋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는 ‘선택’이라는 키워드가 더 마음에 들어왔다, 과연 결혼을 할 때, 나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삶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 책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결혼과 외도,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 주체적 삶을 선택한 ‘키티’라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독서모임을 통해 똑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이번 독서모임은 특히나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책 속 인물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그 모습들을.      


1. 끝끝내 사랑하지 않는 마음.      


  이 책은 인물의 선택과 행동 하나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책이다. 그중 가장 마음이 끌렸던 부분은 바로 ‘키티’가 남편이 죽어가는 순간 남편에게 용서를 빌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되돌리지 않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받는 사랑보다는 주는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늘 사랑을 갈구하였기에, 주는 사랑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주는 만큼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랑이 어찌 ‘주는 만큼 받는 것’이겠냐며, 내가 주는 사랑에 스스로 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라,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일이나, 사소한 것들을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아주아주 느린 속도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사랑’이 싫은 것은 아니어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늘 한가득이었으며, 누군가 조그마한 친절과 호의를 보이면, 가끔 사랑이라 착각하여 부끄러운 순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창피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머지않아 그가 좀처럼 자기 자신을 느긋하게 풀지 못하는 불행한 불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의식이 너무 강했다.(54쪽)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월터가 그렇게 비극적인 방식으로 죽었다는 게 그녀도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고 해도 느꼈을 법한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의 슬픔이었다. 월터가 존경받을 만한 자질을 지녔었다는 건 그녀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따분하기만 했다. (282쪽)


  ‘키티’는 결혼을 하기 전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럼에도 자신이 마음을 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월터’를 만났지만, 시간과 환경에 쫓겨 결혼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을 주지 않은 결혼은 이내, 외도로 이어지고, ‘월터’의 죽음 앞에 용서를 빌며 슬픔을 느끼지만 끝끝내 키티는 월터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나는 감동스러웠고 자랑스러웠다. 아주 조금 감정의 주체는 ‘나로구나’를 깨달은 느낌. 

  나는 사랑이 많아 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하지만 가만히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결국 사랑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도,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사랑 앞에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라는 것. 그만큼 사랑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의 기적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다. 맞다. 그건, 기적 같은 일이다. 상대방의 사랑까지 요구할 수 없지만, 내가 먼저 시작하는 사랑, 그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끝끝내 사랑하지 않는 마음의 키티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선택한 결혼은 결국, 끝끝내 사랑하지 않음으로 끝날 수 있는 일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2. 결혼 선택의 기준과 지속할 수 있는 힘.      


  월터가 키티를 향해 내뱉는 말이 가슴 아프다. 키티의 불륜을 알고도, 선택의 기로에서 월터는 키티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키티에게 현실을 인지할 수 있게 비난하고 조롱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헌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97쪽)


 결혼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너무 이른 나이에 첫사랑과 결혼한 나는, 그가 나보다 어른스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끊임없이 이유를 찾으려는 것은, 그것마저 찾지 못하면, 지금 이 결혼을 지속할 이유들을 발견하지 못하여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 

  월터의 고백은 사랑, 또는 결혼의 지속이 한쪽의 희생과 인내에서 비롯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월터는 사랑의 마음으로 키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했으며, 항상 키티의 입장에서 자신을 맞춰주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불균형한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그녀를 이만큼 사랑하니 그 또한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을까의 기대감. 그 기대감이 무너지는 날, 사랑도 끝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의 결혼은 끊임없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었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할 수 있어’의 마음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으며, 내가 좋아했던 그의 자유로움은 무책임감으로 비추어지기 일쑤였고, 그의 친절함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습이었으며, 심지어 카리스마라 생각했던 그의 모습은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적 제도의 산물이었다. 그런 그이지만, 결혼 생활 가운데 나는 끊임없이 그의 다정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나보다 다섯 살 많은 그에게서 ‘오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발견들이 나의 결혼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믿는다. 

  월터는 키티와 계속 같이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자존심 강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키티의 임신으로 인해,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는 월터는 그 사랑을 계속할 자신이 없어졌을 것이다. 단순히 끝내자가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서 버림으로써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진 것 같은 느낌. 


3. 정리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또 하나를 배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저분은 저렇게 생각하는 구나를 느끼는 시간, 그것에 나에겐 독서모임이고, 그 시간이 참 좋다. 다시, 선정된 책을 읽고 한 달 뒤 독서 모임을 하겠지만, 그 사이에 나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또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이다. 오늘처럼, 사랑에 주체적인, 그러나 끊임없이 흔들리는 키티를 만나기도 하며, 자존심 강한 월터를 만나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숨겨진 나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게, 우리 ‘인생의 베일’은 아닐까.      


* 황동규, 즐거운 편지 중.      


[이야기 나눠 보기]

1)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바로 말하지 않은 월터, 그리고 아내의 임신을 알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간 월터의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나의 결혼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결혼을 유지하는 힘, 또는 끝낼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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