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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시간 141. 제철 행복

# 김신지 에세이_인플루엔셜. # 전주 여행, # 일요일의 침대.

by 벼리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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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맞아 전주 여행 중이다. 여름, 한낮의 태양 속에서, 내륙을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주'라는 공간이 주는 평온함과 잔잔함이 참 좋다. 전주 도서관들을 둘러봐야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 도서관에선 책을 읽고, 작은 독립 서점에서는 책을 한 권씩 사면서, 그렇게 걷고 또 걷는다.


월요일엔 영업을 쉬는 작은 서점들이 많았다. 월요일에 여는 서점을 찾아간 곳. ‘일요일의 침대’. 서점 이름이 주는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작은 공간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책방지기님께선 궁금하거나 책 선택이 어려우면 말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꼼꼼하게 적힌 책 소개 글을 읽다가 ‘2024년도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에세이’라는 구절에 얼른 구입한 책이 ‘제철 행복(김신지 에세이)’이다. 2025년 5월 기준 16쇄나 인쇄가 되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는 것이기에 책을 읽기도 전에 마음이 설렜다. 게다가 제목이 ‘제철 행복’이라니, 언제부터인가 ‘제철’이란 단어가 주는 당위성이 의무감이 되어버렸다. 좋은 의미로서의 의무감. 제철에 맞는 음식을 찾아먹고, 제철에 맞는 꽃을 찾아보고, 제철에 맞는 산책길에서 계절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 그렇게 하루를 채워가는 것. 그 당위성이 주는 편안함과 행복이 나는 좋다.


1. 절기


무심히 넘기던 절기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계절의 흐름이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춘하추동이 들어간 입절 기와 기절기 외에 기온의 특징을 담고 있는 이름에는 소서(작은 더위), 대서(큰 더위), 처서(더위가 그침), 소한(작은 추위), 대한(큰 추위)이 있고, 강수 현상을 나타낸 이름으로는 우수(봄비), 곡우(곡식 비), 소설(작은 눈), 대설(큰 눈)이 있다. 백로(흰 이슬), 한로(찬 이슬), 상강(서리가 내림)은 수증기의 응결 현상을 나타내고, 경칩, 청명, 소만, 망종 등은 이 무렵 만물의 변화를 관찰해 붙인 이름이다. 뜻을 알게 된 것만으로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내고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93쪽)


‘제철 행복’은 24 절기마다 발견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절기에 따른 계절의 변화, 풍습, 속담 등을 다루고 있으며, 그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몇몇 절기들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제대로 알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24 절기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으며, 차례로 계절을 지나온 기분이 들었다. 봄의 입춘에서부터 겨울의 대한에 이르기까지의 절기들을 하나하나 발음하면서 나는 이 계절에 무엇을 하였나,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계절은 다정하게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어서 자연스레 해마다 반복하는 연례행사가 생긴다는 작가님의 말씀처럼, 해마다 돌아오는 나의 시절에 대한 연례행사를 떠올려 보았다. 봄이면 꽃구경을 가고 싶어 하고 가을이면 단풍놀이를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 마음만은 아니구나, 작가님도 그러하구나, 그렇게 확인하면서 우린 정말 풍류의 민족이구나, 그런 마음까지 들었다.


책 속에서 참 인상 깊었던 풍속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토록 다양한 입춘의 풍속 중 정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다. ‘적선공덕행’, 입춘 전날 밤에 남몰래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던 풍습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한 해 동안 나쁜 일을 면할 수 있다 믿었다고. 방점은 ‘남몰래’에 찍혀 있었다. 밤을 틈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기도 하고, 눈길을 깨끗하게 쓸기도 하고, 아픈 사람 집 앞에 약을 지어나 놓는 등의 일을 했다.(30쪽)



따스한 봄 햇살을 받고 올라오는 새싹과 초목들의 시간, 입춘. 입춘에 사람들은 ‘보리뿌리점’을 치기도 하고 ‘아홉 차리’라는 풍속에 따라 같은 일을 아홉 번 하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마음에 다가온 것. ‘적선공덕행’. 남몰래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풍속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면서 2026년 입춘에는 나도 남몰래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좋다.


나에게는 나만의 풍속이나 제철 절기를 맞이하는 행사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주 오래 좋아했고, 지금도 참 좋아하는 분이 있다. 그분과 함께 가을날 은행잎이 온 땅을 덮은 절에 갔다 온 적이 있다. 가을날의 높은 하늘빛과 땅의 노란 은행잎 빛이 눈에 가득 들어왔던 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여서인지, 아니면 가을의 낙엽 때문인지 왜 그날이 오래 기억에 남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다음 가을날에도 이곳에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매년 가고 싶은 곳, 그곳의 방문을 나만의 풍속으로 삼아야겠다.


2.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이 좋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을 어쩌면 ‘마음을 쏟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무사히 잘 담아 온 마음을 한 군데다 와르르 쏟아붓는 시간 같다. 그렇다면 내게 초여름은 ‘바깥’에 마음을 쏟고 지내는 계절. 좋아하는 바깥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즐기고 그게 곧 잘 사는 일이라고 믿으며 지낸다. (142쪽)


여름보다는 겨울을 더 좋아하지만, 이번 여름은 조금 마음이 다르다. 이렇게 쨍한 날, 파란 하늘과 흰 구름에 마음이 자주 머문다. 여름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여름이 점점 좋아진다. 비가 오지 않는 쨍한 여름이.

작가님은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의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의 계절엔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을까, 나는 계절의 즐거움을 어떻게 발견하며, 어떻게 누리며 살고 있을까?

봄의 꽃들을 참 좋아한다. 봄은 꽃피는 계절이라고, 봄의 산책길은 온통 땅 밑을 내려다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바쁘다. 땅 밑의 작은, 손톱보다도 작은 파란 꽃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크다. 노란 민들레를 보는 것도, 한국의 토종 꽃이라는 하얀 민들레를 발견하는 날엔 행운의 선물을 주운 것 마냥 마음이 들뜬다. 이른 봄의 매화꽃과 벚꽃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산딸나무의 연두색 잎과 조팝나무의 하얀 꽃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봄엔 산책이 즐겁다. 봄의 계절마다 나는 꽃에 마음을 쏟는다.

여름은 구름이 제철이다. 장마가 그치고 난 뒤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좋다. 쨍한 햇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지만,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은 마음을 마냥 흘러가게 만든다. 친한 선생님께서 요새 우리나라는 ‘구름 맛집’이라고 표현하셨다. 정말 맞는 말이다. 여름날의 구름은 제 모양을 온전히 갖추고 있어 꼭 마음에 그림을 그리게 만든다. 여름의 계절마다 나는 구름에 마음을 쏟는다.

이번 가을과 겨울에도 마음을 쏟는 일을 발견해 보아야겠다. 그리하여 온 계절마다 즐거움에 마음을 쏟고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3. 정리

‘일요일의 침대’ 책방지기께서 책을 사면서 책갈피를 끼워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지금 절기가 대서이니 여기에 책갈피를 끼워드릴게요.”

지금이 대서이구나, 알게 되었다. 작은 선물 같은 행동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여름은 그렇게 휴식의 자세를 익히기에 좋은 계절. 나의 풍류 선배 다산이 쓴 글 중에 <소서필사> 즉, 더위를 식히는 여덟 가지 방법에 대한 글이 있다. 한여름 무더위가 시작되면, 시원한 물을 한 모금씩 마시듯 이 글을 읽어본다. (180쪽)


지금 나의 여행은 그렇게 휴식의 자세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작은 책방에 들러 책을 사고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땀에 흠뻑 젖도록 걷다가 숙소에 들어가 씻고, 발바닥을 주무르면서 드라마를 보는 것. 그렇게 여름, 이 한 여름을 나만의 방법으로 놀고 있는 중이다. 다시 열심히 일을 하기 위한 쉼임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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