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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시간 143.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 장강명, 차우진, 소향, 정명섭_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

by 벼리바라기


사실, 세상의 모든 연애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런 것 치고는 첫사랑과 결혼해 연애의 경험이 없다. 연애를 많이 못 해봤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연애 이야기를 들을 때면,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 세우는 편이다. 또 가만가만 생각해 보면 소개팅 프로그램보다는 이미 사랑이 끝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연애의 참견, 이혼숙려캠프처럼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누가 가져갈세라 얼른 빌려왔다.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나의 관심사는 맞다.


막상 직장에서는 아이들이 자습할 때나 공강 시간에 편하게 꺼내놓고 읽을 수는 없었다.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 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라는 책 소개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소설의 소재로 ‘불륜 혹은 금기’는 삶 가운데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혹여나 고등학생들이 책의 제목만 보고, 너무 육체적인 사랑만 생각할까 두렵기도 했고, 선생님들도 괜스레 나를 이상하게 볼까 의식되어 아주 살짝, 아주아주 살짝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어린 시절 달력으로 교과서 책 커버를 만들 듯, 도화지로 책을 감싸 들고 읽었다. 책을 다 읽고는 네 편의 소설이 모두 좋아, 오래 마음에 되새김하며, 생각의 끈을 이어갔다. 참 많은 것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1. 자학적인 관계,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시간


이름은 중요하다. 뭔가를 정확히 가리키고, 다른 것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니까. 나는 그녀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알았다. 섹스 파트너. 그 용어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몰라 골머리를 썩였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 몰라 고심했을 것이다. (15쪽)

나는 스물아홉 살 남성이었고, 투란도트가 절망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자기 파괴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 자동차를 시속 2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그런 종류뿐이었다. 절망했다면서, 자신을 파괴하고 싶다면서, 왜 확실하게 자기 숨통을 끊지 않는가? 나는 복원의 희망 자체에 무심한 사람은 느리고 쓸쓸하게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49쪽)

투란도트의 집, 장강명



장강명 작가님의 소설은 매력적이다. ‘한국이 싫어서’도 참 좋았지만, 독서 모임으로 함께 읽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법’은 두 번 읽고 나니, 처음엔 마냥 어렵다 생각했던 책의 내용이 다르게 다가왔고 구절구절의 의미가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도서관에서 장강명 작가님의 책을 발견하면, 한번 들춰보게 된다. 읽고 싶어서 마음이 들썩일 때도 있다.

스물아홉 살 남자와 서른여섯 살 직장 상사 여자의 섹스. 여자의 ‘술 좀 더 마시자’라는 말이 모텔을 가자는 말인지, 정말 술집에서 술을 마시자는 말인지조차 헷갈렸던 남자는 여자와의 섹스를 통해 여자에 대해 궁금함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시작은 궁금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주말엔 뭘 하면서 보내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 하지만 여자는 그 어떤 질문에도 ‘궁금해하지 마. 난 안 궁금하니까.’라고 말한다. 나중에서야 남자는 자신과 여자의 관계가 ‘섹스 파트너’였음을 받아들인다.

남자가 방문한 여자의 집은 모텔과 다를 바 없었다. 창이 없는 답답함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곳. 남자는 오페라 투란도트를 떠올린다. 그저 쓸쓸하고 공허함만 있는 투란도트의 삶, 그리고 섹스를 하면 꼭 울고 마는 여자의 절망적인 삶.


책을 읽으면서 여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절망이지만, 나의 상황이 여자의 상황과 동일하다면, 나는 그 절망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계속 들었다. 남자는 여자의 행동이 '복원과 희망 자체에 무심한 사람'의 자기 파괴임을 알게 된다.

흔히들 사랑을 이야기할 때 '구원 서사'를 많이 이야기한다. 나의 사랑이 너의 구원이 될 수 있기를. 그의 사랑이 나의 구원임을, 나의 살아감이며, 희망이고 존재라고. 이제는 그런 사랑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스무 살 땐 나 또한 사랑이 그러한 줄 알았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의 마음을 내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경험해보지 않았으나, 경험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자기 파괴적인 사람을 향한 기다림의 사랑은 내겐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고 여자의 시간과 그를 향한 남편의 시간과, 스물아홉 살 그의 시간이 이해가 되었다. 한동안 이 소설 앓이를 할 것 같다.

2. 우연이라는 착각


살면서 잊히지 않는 낯선 이를 만날 확률 그리고 그 사람을 내 집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너는 예측 가능한 내 삶의 얼마 되지 않는 우연이었다. (127쪽)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안락한 삶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뭘 더 좋은 걸 했겠는가.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네게 약속한 대로 증명할 것이다. 우연을 만든 건 너이나 우연을 받아들인 건 나다. 이처럼 너를 사랑했으니 너의 마음도 같았는지를 새로 주어질 좁은 방에서 천천히 생각해보려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 그것으로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내 안의 깊은 동굴에 들어가 너와의 매 순간을 곱씹으며 기어이 그러할 것이다. 너에게 쓰는 이 편지가 그 시작이다. (158쪽)

- '포틀랜드 오피스텔' 중, 소향.


예측가능한,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이지만, 소설의 문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 서정적 감성을 따라가며 책을 읽는 시간이 나는 좋았다. 물론 불륜이며, 여자의 복수심에 시작된 의도된 접근이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파탄 내겠다는 명백한 의도의 실현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의 한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측 가능한 삶의 얼마 되지 않는 우연'이라 생각했던 여자와의 만남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남자는 여자의 목을 조른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남자 또한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한 환경과 느낌의 여자, 그 여자의 대한 호기심이었을 거라고, 아니 사랑이라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동창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직장 동료와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아내에게 주고 이혼했지만, 1년 만에 헤어진 동창의 상황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을 거라고 남자는 말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여자와의 관계가 모두 밝혀진 다음, 남자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소설은 끝난다. 소설이 참 아름다웠음에도, 재밌게 잘 읽었음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소설 속 상황에 너무 몰입하고, 나 스스로 요즘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부정적이어서 그리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남자의 독백이, 다짐이 우습게 여겨졌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집착은 위험하다.


3. 정리.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 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로 묶인 이 책은 가볍지 않다. 아주 많은 것들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는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해주기도 한다. 또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행해지는 폭력들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처음의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책의 깊이에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임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쉽지 않은 길이며,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라는 것. 또한 네 편의 소설 모두 배경의 음악들이 큐알코드에 담겨 있었다. 비탈리의 <샤콘느>는 여러 버전으로 들어보았다. 슬픔이 몰려왔다. 책과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불륜 혹은 금기, 그런 유혹의 순간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예측 가능한 삶의 얼마 되지 않은 우연이 자신의 삶 속에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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