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혜영 소설_문학동네
편혜영 작가님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전에 '홀'을 정말 재미있게 읽어서, 신작이 나오기 전에 작가님의 다른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이며, 2021년에 출판된 책이었다. 읽으면서, 새삼 몰입력이 이토록 강한 소설을 적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소설을 읽을 수 있어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공포 소설보다 무서웠다. 살인이나 범죄처럼 명확한 장르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이 무서웠졌으며, 어린아이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크게 다가왔고, 가난이 주는 삶의 피폐함에 겁이 났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결국 소설이 현실을, 오롯이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요즘, 뉴스를 접할 때면, 현실이 제일 무섭구나, 소설과 영화와 매체는 결국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그런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1. 플리즈 콜 미
그렇기는 해도 언제라도 술 마시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딸이 요리를 하려다 술이 줄어든 것을 알아채기 전에, 사위가 술냄새를 맡기 전에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미조가 이곳에 온 후로 딸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미조는 한동안 긴장했다. 드디어 술 얘기를 꺼내는구나 싶어서였다. 미조는 변명거리를 마련해 뒀고 바로 술을 끊겠다고 약속할 생각이었다.
술은 미조가 온종일 잠을 자든 소리 죽여 울든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잠을 자도록 도왔고 마음껏 울도록 도와주었다. 미조에게 그렇게 해 주는 건 술이 유일했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느긋하고 애틋하게 지난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금 더 마시면 금세 낙담에 빠져들었다. 취하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찾아왔고 알고도 간과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122쪽)/'플리즈 콜 미' 중.
'플리즈 콜 미'는 남편의 실종 이후 미국에 사는 딸네 집에 기거하고 있는 '미조'의 이야기이다. 마음속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남편 실종에 얽힌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미조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생활의 불우함으로 인해 술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술을 마시는 것을 딸이 모르길 바라며,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믿기도 하고, 환청과 환각에 시달린다. 이미, 알코올 중독인 것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교 때는 술을 좀 마셨다. 사실, 맛있어서 마신 것도 아니고, 멋있어서 마신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술을 찾는 많은 순간들이 있겠지만, 슬퍼서도 기뻐서도 아닌 그냥 딱 그 시기, 대학생 초반에 나도 그렇게 술을 마셨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순간들도 있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 여기저기 멍든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슬금슬금 나를 피하는 선배들을 마주하기도 하며,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치욕의 순간들을 그 당시엔 많이 새겼다. 지금은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다. 참 좋은 분이 술을 좋아해서 함께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긴 해도 회식의 순간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마신다. 술이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긴 하다.
남편은 술을 많이 좋아한다. 반주로도 마실 정도, 어쩌면 매일매일 먹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차에서 잠들긴 해도 술로 인해 큰 사고를 일으키거나 사건을 만들진 않았다. 소설 속 미조처럼, 온종일 자거나 울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모른다. 처음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술에 취해 들어올 때면, 그의 아픔과 슬픔,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순간의 고통과 선택을 이해해보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술을 슬픔과 고통 때문에 마시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술 마신 다음의 숙취는 남편의 몫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냥 이해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좀 많이 슬펐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에 다가가려 노력했고,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미조의 상황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타국에서 남편 없이 종일 딸을 기다리는 마음,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사위와의 관계, 좁은 집에서 얹혀 살아가는 순간들, 술이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 결국 딸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미조는 이미 술로 인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게 된다. 미조의 딸은 엄마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자며, 자신이 잘하겠다며 말한다. 그 말이 참 슬프게, 아프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희망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2. 불안감을 조성하는 사회
"길거리에 나서면 각종 범죄에 쉽게 노출됩니다. 그다음이 단독주택이고요. 단독주택에서 위험을 겪을 확률은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아파트보다 1.36배, 별의별 사람이 모이는 유흥업소보다 1.4배, 누가 묵는지 모를 숙박업 소보다 2.9배 높습니다. 집에 있다가 범죄를 당하는 거죠. 이런 골짜기 외딴집은 단독주택이 아니라 길거리로 보는 편이 낫습니다. 잠금장치가 허술한 모텔이나 폭력배가 드나드는 읍내 노래방이 이 집보다 안전합니다." (19쪽/'어쩌면 스무 번 중)
"이쑤시개 때문에 죽는 사람이 번개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많아요."
운로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재게 걸으며 얘기했다. 화재로 인한 사망자보다 길거리에 보행하다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뱀이 테러리스트보다 위험하다고도 얘개해줬다. 숨이 찼지만 쉬지 않았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멈춰 선 것도 개의치 않았다. 내친김에 이제껏 모아 온 죽음의 확률을 죄다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상어보다 나무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코코넛을 조심하는 게 낫다고 얘기하자 그는 별난 농담이라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59쪽/ '호텔 창문' 중)
책을 읽으면서 안전에 대하여 생각했다가, 요즘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들에 대하여 생각했다가, 무엇보다 무서운 건 사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책의 표지 제목이기도 한 '어쩌면 스무 번'은 치매 걸리 아버지의 요양과 경제적 어려움, 남편의 질병으로 인해 시골로 이사 온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업을 하러 온 보안업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부는 사고를 당할 위험과 불안감에 모형 CCTV를 설치한다. 잠시 부부가 외출을 다녀온 사이, 보안업체 직원은 울타리를 넘어 그 부부의 집에까지 들어오고, 예전 집에서 벌어진 살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보안업체 직원의 목소리가, 말투가 활자임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무서움이 느껴졌다. 안전을 판매하기 위해 불안을 조성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불안해졌다.
초등학생을 납치하려 시도했던 사건, 길거리에 지나는 행인을 무차별로 살인한 사건, 보복 운전으로 위협을 가하며 쫓아와서 폭력을 행사한 사건, 그리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무고한 시민을 폭행한 사건 등 우리 사회는 이미 이상동기 범죄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기사를 통해 많이 접하고 있다. '세상에 이상한 사람 정말 많아' 또는 '상식적이지 않은 사회야'라는 말로 그 현상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타인 더 나아가 지인에 대한 불안감마저 점점 커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적 범죄에 대한 불안이 개인의 안전 의식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잘 알고 있어서 더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3. 정리
편혜영 작가님의 책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는 현실적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끝자락이면서 가을의 시작인 지금, 책으로 인해 서늘함이 배가 되었다. 단순히 재밌게 잘 읽었다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짐이 삶에 더해진다. 소설이 주는 생각의 힘이다.
[이야기 나눠보기]
1) 술을 마시고 싶었던 순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술을 언제 마시고 싶었으며, 그 뒤의 상황들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불안감이 들곤 합니다. 요즘 마음에 가장 오래 남아 생각이 많아졌던 사건이 있다면 어떤 일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