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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Nov 13. 2023

책들의 시간 59. 자기 앞의 생

# 자기 앞의 생_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용경식 옮김_문학 동네


  유명한 책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쉽게 읽을 생각은 못했다. 몇몇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읽고 있던 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또 여러 번 제목은 들어보았으나 읽지 않았던 것은 한국 작가의 소설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제목이 주는 어떤 평범함에 인생을 다루는 책이겠거니 그렇게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라는 말을 붙이기엔 너무 슬픈 책이어서, 마음이 그랬지만 그래도 막힘없이 술술 읽어가는 책, 그러면서도 평범하다는 이름으로 고만고만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감사함이 들었던 책이다. 여전히 나는 타인의 불행에 위로받고 마는 그런 나쁜 사람임을, 그나마 그것이 소설이었음에 다행이다 생각하고 마는 그런 사람임을 자각하게 만든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이력에, 그리고 작가가 죽기 전 남긴 유서의 형식이었던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짧은 글에 마음을 빼앗겼다. 처음 책을 빌릴 때, 도서관 검색을 하면, 작가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이렇게 나왔다. 그게 뭔지 몰랐다. 나중에서야 ‘로맹 가리’라는 사람이 필명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책 중 한 권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한 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수상하지 않는다는 ‘공쿠르 상’을 다시 받았음도 알게 되었다. ‘로맹 가리’는 정말 소설 같은 삶을 산 소설가였구나.


  삶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갈망은 온갖 다양한 형태와 가능성 속에서 아무리 다른 맛을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다. 항상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서로 모순된 나의 충동들은 나를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만들었고, 나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새로운 변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뛰어난 수단인 소설과 성생활 덕분에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불변수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아들과 사랑과 강아지 샌디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나의 안정감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것은 거의 정열로까지 발전했다.

  그런 심리상태였기 때문에, 에밀 아자르의 탄생과 짧은 생애와 죽음에 대해서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설명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었다. 나는 다시 시작했다. 나는 이제 모든 기회를 다시 한번 갖게 되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나 자신의 탄생에 대한 환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329쪽) -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중.


  소설가의 삶에 대하여 궁금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소설의 내용과 작가의 삶이 분명히 분리되지만, 왠지 상상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마음이 한 구석에 늘 있었다. 로맹 가리가 고백한 한 구절,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새로운 변신을 가능하게 해 주는 소설’ 그것이 소설을 쓸 수 있게 만들었음이, 참 공감이 가면서도 부러웠다. 그리고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신 ‘아밀 아자르’     


1. 폭력인 줄 모르면서 행해지는 폭력.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자전거도 없이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이제 와서 이 작자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들다니.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좋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하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다. 단지 내가 훌륭한 회교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 나는 어떤 끔찍한 폭력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움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어 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 녀석이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65쪽)


  주인공 모하메드(모모)는 어린 시절 유대인 로자 아주머니의 집으로 맡겨졌다. 계속에서 들어오던 모모의 양육비가 더 이상 송금되지 않아도 로자 아주머니는 모모와 함께 지낸다.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는 서로 친절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필요했으며, 어느새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책을 읽는 내내 영화가 생각났다. 고레에다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어른들 없이 아이들끼리 살아가다 비극을 맞이하는 내용의 영화, 그리고 버려진 아이를 기르는 내용의 그런 영화들. 영화와 소설이 다루는 삶이 현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잘 알지만, 모르고 살아가겠다 마음먹으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현실들. 소설은 그런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모모는 타인의 친절을 이용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의 불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친절이 때로는 모모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모모 스스로 그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폭력, 모모는 상처받은 마음에서 벗어날 길 없는 그 순간을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고 이야기한다.


  타인을 위로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또는 친절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가 없는 아이에게, 너는 우리 아이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우리 집에 놀러 오렴, 그렇게 말하는 것. 친절한 어떤 태도들의 이면에 나는 너와 다르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어떤 위로도 누군가에게는 결핍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방아쇠가 될 수 있음을. 어렵다. 진심을 전하는 것도 어렵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어렵고, 위로도 참 어렵다. 나는 여전히 어려운 것 투성이의 삶이다.      


2.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중절수술을 받지 못했는데, 그땐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그 얘기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그녀는 교육도 받고 학교도 다녔다고 했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256쪽)     


  로자 아줌마의 몸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갔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은 부당했다. 그녀의 내장 기관들은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고 하나가 괜찮으면 다른 하나가 고장을 일으켰다. 공격을 받는 것은 언제나 방어 능력이 없는 노인들이었다. 그것이 더 쉬운 일이니까. 로자 아줌마는 이런 범죄의 희생자였다. 심장, 간, 신장, 기관지,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집에는 이제 아줌마와 나밖에 없었고, 밖에도 롤라 아줌마뿐이었다. 매일 아침 나는 로자 아줌마의 굳은 몸을 풀어주느라 운동시켰다. 그녀의 뼈마디가 완전히 녹슬어버리지 않도록 그녀의 어깨를 부축해서 방문해서 창문까지 왔다 갔다 하게 했다.(262쪽)


  열 살인 줄 알았지만 열네 살이었던 모모는 창녀였던 엄마의 선택으로 태어난 아이다. 중절 수술이 계획적인 살인이라 여겼던 엄마의 선택, 그리고 엄마는 아빠에게 살해당했으며,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에게 맡겨져 생을 이어간다. 모모를 키운 로자 아줌마는 늙어가면서 병에 걸리게 되고, 모모는 아줌마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아줌마 곁에 있는다. 한때는 창녀였지만, 맡아 줄 이가 없는 이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로자 아줌마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모모, 두 사람의 삶을 보면서 ‘자기 앞의 생’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함께하는 삶에 대하여도.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결국 자기 앞의 생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삶의 비극을 너무 일찍 알아버려 더 이상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모든 자식과 엄마가 생각났다. 로자 아줌마가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대소변을 처리해야 할 때도 모모는 그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해낸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아줌마 곁에 있는 모모.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로자 아줌마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모모는 최소한의 도움으로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지킨다. 열네 살 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모모는 그렇게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낸다.      


3. 정리


  독서 모임 가운데 선생님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분명히 슬픈데도 따뜻한 이야기이었다고. 처음엔 나는 이 책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모가 살아가는 세상, 로자 아줌마가 있어서 다행이었으며, 로자 아줌마가 아픈 그 시간에도 주변의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적인 소설임에도 따뜻함을 기대하게 하는 결말이었다. 온 마음을 다해 모모가 따뜻한 세상을 만나기를 바란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자신도 모르는 우월감과 안도감에 타인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는지 떠올려 봅시다. 그걸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삶 가운데 따뜻한 이웃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며,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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