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리바라기 Jan 08. 2024

책들의 시간 67. 또 못 버린 물건들

# 또 못 버린 물건들_은희경 산문_난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문을 펼쳐 들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또 못 버린 물건들’이라니. 새해, 어김없이 미니멀리즘의 가벼운 삶을 다짐해 보건만, 성격상 쉽지 않은 일임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물건에 대한 이야기들은 추억과 함께 누군가를 떠올리기 만든다는 생각에 궁금해졌다. 작가의 물건들은 뭘까? 작가가 못 버린 물건들은 어떤 물건들일까, 그런 생각들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산문이라 읽으면서 작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으며, 작가의 직업적 삶에 대하여 유추할 수 있었고,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이 좋았다. 나에게 아주 오래된 꿈이 있다면, 사진과 함께 읽는 수필을 적어 보는 거였는데, 이 책이 그런 책이었다. 작가가 직접 찍은 못 버린 물건들에 대한 사진과 그 물건들에 얽힌 이야기, 작가의 삶의 이야기.      


1. 못 버린 나의 물건들


  함께한 시간과 삶의 궤적이 담겨 있어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을 하나하나 간직하기에는 나의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고 또 우리 집이 그다지 넓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머지않아 작별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나에게나 소중한 물건일 뿐이므로 그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어 던지거나 내 소설 속 소년이 버린 침대처럼 폐기물 딱지를 붙인 채 빗속에 방치해야 할지도 모른다. 작별의 마지막은 어쩔 수 없이 단호하고 차가워야 하겠지. 하지만 그 물건들의 시작, 찬란했던 모습들, 나와의 인연, 내 곁에 있었던 시간과 그 덕분에 만들어진 즐겁거나 힘들었던 이야기의 파편들은 어딘가에 남아 내 인생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158쪽)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겠다며, 이것저것 잔뜩 버리곤 했었다. 하루에 하나씩 버리기를 실천한답시고 하나를 버리고는 세 개를 다시 산 적도 있으며, 추억은 이미 넘친다고 사진들도 그냥 버렸던 적이 있었다. 지나고 문득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물건이 주는 압박감에 가볍게 살고 싶다는 마음의 열망은 커져 갔으며, 무엇보다 홀로 집에서 죽음을 맞은 분의 집을 청소하고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더 집에 물건을 두기 싫어졌다.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부지런하지 못한 일상으로 인해 물건들은 쌓여만 갔고, 때로는 이미 정이 들어,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귀한 인연과 닿은 어떤 물건들은 그것대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나에게 못 버린 물건들은 무엇이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빠의 편지, 1980년대에 쓰인 아빠의 편지는 가부장적이면서 따뜻했던, 가장의 책임감에 홀로 짐을 지고 외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아빠의 유물이다. 아빠는 1989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아빠의 편지는 우리를 향한 애끓는 사랑이었고, 잘 살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단연코 버릴 수 없다.


  브런치에 글을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아빠의 편지를 브런치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잘 올리지 못했다. 나에게 귀한 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읽힐 땐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가족의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정보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문득 겁이 났다. 그래서 멈추었다. 하지만 올해는 아빠의 편지를 나만의 폴더에 잘 정리해 놓아야겠다. 나에게는 이미 넘치도록 소중한 흔적이므로.


2. 책상에 앉으면 보이는 것들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포스트잇 메모와 등장인물 설명표. 최근에 썼던 단편소설 메모이다. 저렇게 등장인물들의 나이와 외모, 특징 등을 적어 붙여놓으면 그 인물이 할 만한 짓과 동선을 떠올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수시로 체크하지 않으면 캐릭터가 자칫 일관성을 잃을 수도 있고(모름지기 작가란 머릿속에 등장인물을 모두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던데……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엽서들은 새 소설집이 나왔을 때 ‘업계’의 동료들이 보내준 손글씨 편지이다.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책을 쓴다는 건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용을 지불하고 내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책상 앞의 작가는 시시각각 불안에 쫓기고 자신을 의심하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스스로를 믿어야만 계속 쓸 수 있으므로 이처럼 자기 강화를 위한 소품을 동원하기도 한다. 내 글을 즐겁게 읽어주는 사람의 다정함이야말로 나를 옹졸한 인정 욕구에서 벗어나 자기 발전력(?)을 충전하게 만드는 배터리이다.(198~199쪽)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책상 앞 보드판엔 이런 것들이 있구나, 그런 마음에 괜스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또한 직업적 작가로서의 부담감과 책임감도 느껴졌다. 글을 즐겁게 읽어주는 사람의 다정함으로 인해 작가가 인정욕구에서 벗어나 자기 발전력을 충전하게 만든다는 구절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고. 이십 대에 읽었던 은희경 작가의 책들에 대한 생각도 났고.

  작가는 글을 쓰다가 주변을 잘 둘러본다고 했다. 물론 생각을 다듬는 중이라 뭔가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가의 집중을 깨지 않는 풍경을 원하게 되는데, 지금 집에서는 메모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고. 작가의 메모판을 엿보는 맛이 있었다. 가족사진들과 글과 관련된 포스트잇들.

  나도 처음 집을 이사하고, 책상 앞 공간에 자석 보드판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들여 검색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망설여지긴 했지만, 딸아이 방에도 붙여 주고, 내 책상 앞에도 붙이고 싶은 마음에 조금 무리를 해서 장만한 보드판. 그게 지금도 참 마음에 든다.     


  절대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할 수 없는 보드판이다. 우선 나의 보드판엔 여러 자석들이 있으며, 정말 좋아하는 분이 직접 찍어 주신 사진이 있다. 그리고 함께 일했던 미술 선생님이 적어주신 캘리그래피 시 구절도 있고, 좋아하는 샘이 주신 MBTI 엽서도 있다. 무엇보다 반려 돌. 아주 오래전에 주운 돌이었는데, 계속 가지고 있다. 작가의 글에 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버리지 못하는 돌에 대한 이야기. 나도 그런 돌이 있어 재미있었다. 딸아이의 고등학교 때 사진도 있다. 책상에 앉으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공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지는 시간들. 그러고 보니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런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언젠가는 또 다른 것들로 채워질 것도, 잘 알고 있다.   

   

3. 정리     


 빛바랜 틴 케이스에 들어 있던 귀고리를 달아보려다 귓불이 막힌 걸 알았을 때는 멋진 액세서리를 찾아다니던 시절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찾고 원하는지, 어떤 순간에 다정하고 또 즐거운지.(10쪽)


 2024년도가 시작되었고, 거짓말처럼 바쁜 일들에서 한 차례 쉼을 얻었으며, 일상의 작은 여유들을 되찾았다. 방학이라는 시간도 있어서이겠지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마음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못 버린 물건들은 올 한 해를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며,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찾을 것이고, 원할 것이며, 또 어떤 순간에 그 순간 앞에 다정하고 즐거울 것이다.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영화 ‘위시’를 보고 나오는데, 친구 같은 딸이 물었다.

  “소원이 뭐야?”

  “무사안일, 만사태평”     

그런 한 해가 되기를, 탈이 없고 평안한 한 해가 되기를, 나도, 그도.   


[이야기 나눠 보기]

1) 가지고 있는 물건 중 못 버린 물건이 있다면, 어떤 물건인지,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책상이 의미 있는 공간이라면, 책상에 앉았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는 물건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작가의 이전글 책들의 시간 66. 겨울을 지나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