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세 좌절의 시대_장강명 산문_문학동네
제목이 좋았다. ‘미세 좌절의 시대’. 꼭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작가를 보니, 장강명 작가님이었다. 작가의 책은 단편 한 편 정도를 읽은 기억밖에 없다. 제목이 좋아서 몇 번 읽으려 도전을 해봤으나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놀러 갔을 때 ‘한국이 싫어서’라는 영화에 대한 홍보를 본 적이 있었고, 어떤 선생님께서 그 책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것들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을 듣는 순간, 책이 떠올랐는데, 그 책의 지은이가 장강명 작가였다.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댓글부대’의 작가도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막연히 영화화하기 좋은 책을 많이 창작하는 작가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얼른 빌렸다. 댓글부대 영화를 찾아보기 전에 그냥 작가의 책들을 몇 편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나에게 소설은 어려웠으니 수필 같은 산문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미세 좌절의 시대’는 기자였던 작가가, 칼럼으로 발표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래서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발견할 수도 있는 책이다. 읽으면서 아주 살짝 나와는 다른 어떤 생각들을 발견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묘한 설득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1. 미세 좌절의 시대를 작은 성취의 기쁨으로.
이제 사람들은 개인 차원에서 시나리오 경영을 내면화한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일단 계획을 세우고, 상황이 바뀌면 그때마다 수정하자. 그렇게 불확실성을 품어보려 하나 부질없다. 우리의 시간표는 전보다 더 촘촘하다. 전체 일정이 외부 변화에 그만큼 더 취약해졌다는 의미다. 통신수단이 발달하며 약속 시간을 변경하기도 쉬워졌다. 타인의 계획이 바뀌어 내 계획이 바뀌고, 내 계획이 바뀌어 또 다른 타인의 계획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미세 좌절’ 이름을 붙여본다. 한두 번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이게 쌓일수록 제아무리 낙관적인 이도 결국 굴복한다.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 원인을 명확하게 짚어낼 수 없기에 더 무력감을 느낀다.(96쪽)
‘미세 좌절의 시대’라는 제목을 가진 이 칼럼은 ‘시나리오 경영’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적은 글이다. 기업의 경영관이 사회의 현상에 따라 변화할 때 그것이 뉴스 보도나 신문지면,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사람들은 그 경영의 방침을 자신의 삶 속에서 내면화하게 된다. 계속해서 수정되는 기업의 경영관처럼 사람들의 계획도 상황에 따라 수정이 된다. 불확실성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의 온전한 목적을 가질 수 없는 사회 현상, 그것에 대하여 작가는 ‘미세 좌절’이라 명명한다. 아무리 낙관적인 사람도 계속되는 좌절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으며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고 말한다. 공감이 갔다. 무력감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좌절감에 대하여.
무언가 계획을 세우는 삶이 참 필요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미래를 생각하고, 목표를 정하고, 그런 길들에 대하여 동경했다. 하지만 인생은 정말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순간순간 다가오는 어떤 일들에 대하여 대비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었다. 임기응변의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어떤 목표도 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무기력해지지는 않았지만, 살다 보니 살아지는 그런 날들이었다.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목표를 세웠다가,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다가, 다시 이루고 싶은 어떤 목표를 세웠다가 다시 아무런 도전도 없이 살아가는 삶의 반복이었다. 지금도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하루하루의 성취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기는 한다. 내가 붙인 이름은 ‘작은 성취의 기쁨’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목표로 세워 하나하나 지워가며 작은 성취의 기쁨을 맛보려 노력 중이다. 거시적인 관점의 목표는 없어도 미시적 관점의 목표는 세워 하루를 살아가는 것. 나름대로 ‘미세 좌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이다.
2.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그리고 분노의 도로
인생에 대한 질문 중 어떤 것들은 실상 큰 의미가 없거나 더 나아가 해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에는 꽤나 깊이 있어 보여도 그렇다. 대표적으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그에 해당한다고 믿고 있다.
이 질문은 마치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처럼 다가온다.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목적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질문이 무겁게 느껴질수록 그 무게에 걸맞은 무거운 답을 내놔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면 질문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삶에 대한 질문이 그렇게 삶을 침식한다. (264쪽)
어떤 질문과 답으로도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는 끝내 해명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동시에 좋은 삶과 좋은 식사의 비결은 다들 이미 웬만큼 알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여러 반찬을 골고루, 음미하며 꼭꼭 씹어 먹는 것 아닌가. 한 입, 한 입. 일 분, 일 분. (267쪽)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질문들이 주는 무거움을 잘 안다. 그리고 나는 사실, 답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으며, 삶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일도 쉽지 않다. 때때로 흔들리기도 한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다. 확신이 주는 어떤 믿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연휴 동안 영화를 봤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주변 선생님들의 추천도 있었고, 좋아하는 지인이 조지 밀러 감독의 방한 때 영화소개를 보고 와서 영상이 정말 뛰어나다는 말도 해 주었기에 궁금함이 있었다. 그래서 본 영화, 보고 나서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정말 재미있어서.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배경으로 영화는 퓨리오사의 서사를 들려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더 궁금해졌다. 매드맥스 시리즈를 본 적이 없었기에, 퓨리오사의 이야기가 담긴 ‘분노의 도로’도 다시 봤다.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에 나처럼 매드맥스 사가를 보고 난 다음 분노의 도로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생각도 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마지막에 자막으로 올라가는 글, ‘희망 없는 시대를 떠돌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퓨리오사가 끝까지 돌아가길 원했던 고향과 사람들의 희망과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생각했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작가의 말처럼 좋은 식사와의 공통점을 들어 골고루, 음식을 음미하며 꼭꼭 씹어먹는 그 순간. 그것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에는 정말 공감한다.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하루하루의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여전히 어떻게 살 것인가? 더 나은 삶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 앞에선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지금처럼, 책을 통해 생각을 정립하면서, 때로는 생각을 수정하면서, 깨달음에 감사하면서, 또 나누면서 그렇게 살아야겠다.
3. 정리.
유난히 생각해 볼 구절을 많이 발견한 책이다. 감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한 부분을 뚝 떼어내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기도 했으며, 사회의 현상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다. 미세 좌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를 고민하는 질문에 때로는 가볍게,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 그런 책이었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미세 좌절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나의 하루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천천히 음식을 먹듯 음미하며 하루의 생활을 되돌아봅시다. 가장 맛있었다고 생각한 시간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