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의 가을 나들이)
지난겨울,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매서운 황소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에 부친 뽁뽁이. 어차피 올겨울에 또 부칠 텐데 하는 게으름의 발로로 그대로 방치했던 그 것. 때문에 사계가 분명한 창밖의 계절도 무시하고, 뿌연 시야의 갑갑증도 간과 하면서 봄과 여름을 떠나보냈다. 계절 마다 찾아오는 새들과의 눈 맞춤과 그네들의 노랫소리마저 듣지도 아니하고 잊고 살았다. 속삭이듯 내리는 보슬비도 숨 막히는 여름의 뜨거움과 억수로 내리는 비의 울부짖음도, 만나지 않았다. 그만큼 여유 없는 분주한 날들을 보냈으니까.
때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찬란한 빛을 내뿜는 창문 밖 아름다운 그네들의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또한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만큼의 강풍 때문에 속수무책, 그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소나무와 감나무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지 못했다. 내 몸의 통증과 그리움 때문에 시간을 망연자실 그저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허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새들은 노래 부르며 그곳에 있었고 나무는 열매를 맺었다. 창문 밖 그들이 있는 그 곳은 그들의 안식처였기에. 내가 늘 그리던 이곳 고향 강동에, 삼십여 년 만에 와 있듯이.
햇볕이 유난히 포근하고 아름답던 시월 하순 어느 날 오후. 뿌연 뽁뽁이 너머 흐릿한 주홍, 부드러운 색이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게 뭐지’ 하며 거의 일 년 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한쪽 창문을 여니 이럴 수가. 아가의 머리만한 감이 내 눈을 가리고 있지 않은가. 아~하는 탄성과 함께 감동과 기쁨이 동시에 터졌다.
서울임에도 사방이 비닐하우스와 밭뿐인 내가 사는 삼층 빌라. 이 층인 내 작은 집의 창문은 유난히 크다. 창문을 열면 풍성한 노송과 감나무의 이파리 때문에 온갖 새들의 놀이터로 자리매김한 나의 나무들. 그네들로 인해 멀리 있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의 일렁임도, 참을 수 없는 몸의 통증도 얼마나 위안을 받았었는지.
주홍빛 풍성한 감나무의 감들은 삼층보다 높이 까마득한 곳부터 달려있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을 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곳에 달려있었다. 목을 창밖으로 길게 빼고 감나무를 올려다보니 그곳은 감들의 천국이었다. 주렁주렁 그야말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이 제격이었으니.
가위로 눈앞의 감을 잎사귀가 붙은 줄기까지 싹뚝 잘랐다. 그리곤 눈높이 위에 달려있는 두 개의 커다란 감도 똑똑 땄다, 잎사귀와 함께. 두 개의 감은 감잎을 깔은 예쁜 소반에 담아 창문턱에 두었다. 그리고 잎과 줄기째 자른 감은 벽마다 걸었다. 깊은 가을이 내 작은 집을 물 드리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집안을 맴맴 돌고 돈다. 순간 ‘가을을 벽에 걸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앉은 까닭은 무엇이려나. 그 작은 것들에서 뿜어내는 빛이 집안을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 일 테다.
유난히 빠르고 바빴던 올 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늘 잘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허우적댔던 시간들. 그러나 결코 잘살지 못한 것만은 아니라며 한껏 나를 토닥인다. 그만큼 주홍의 따듯함은 내게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으니까. 우연히 민화를 접하게 됐다. 민화의 시작은 모란이라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됐으니 민망할 따름이다.
밑그림인 모란위에 한지를 대고 붓으로 가늘게 본을 뜬다. 그 후 조심스레 채색을 하며 마음을 비운다. 생전처음 경험하는 민화의 채색은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이며 쉼이다. 세 시간 동안 나는 활처럼 휜 등의 모양을 한 채 모란에 빠져서 속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버려버린다. 왕초보지만 집중하며 열심인 내 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테다. 그 또한 내 안에 가을을 걸은 것은 아닐 런지. 때마침 고궁박물관의 ‘안녕 모란’ 전시회는 내가 더욱 모란에 몰두하고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 하였으니까.
요즘 부쩍 행복하고 평안하다. 나에게 행복과 평안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자신에게 반문하다 지워버린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고민 같지도 않은 일로 시간을 흘려보낼 만큼 남아있는 나의 날들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결정했다. 얄팍한 자존심에 망설이다가 그리운 아들들에게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거야’ 자식들에게 듣고 싶었던 보고 싶어요, 이제 그만 돌아오셔요, 라는 말. 빈말일지라도 듣고 싶어 안달 났던 내가 속상했었던 나. 그런데, 티켓팅을 하고 나니 이렇게 행복하고 기쁜데 무엇을 기대하며 바랬는지 정말 한심한 인사다.
가을 햇빛에 그 빛이 더욱 짙은 벽에 잔뜩 건 감 가지와 창턱에 곱게 놓인 여러 개의 가을을 보니 함박웃음이 얼굴 가득 담긴다. 게다가, 속내 깊고 고운향기를 머금은 친구가 안겨준 두 개의 얌전한 노란국화 화분은 주홍빛 감들과 함께 내 작은집에 영롱한 가을의 향기를 물씬 풍기며 외로워하는 나를 달랜다. 돌아올 즈음에 감은 익어서 말랑하고 달콤해져 있을 테고 국화 다발은 마른 꽃이 되어 나를 반길 테니까. 몇 달 후 돌아와도 진정 외롭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곱고 풍성한 가을을 벽과 집안 곳곳에 걸어놓고, 놓아두고 잠시 외출 하는 거니까.
내 작은 집안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가을아, 돌아 올 때 까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있거라. 나도 보고픈 자식들 실컷 보고 만지다가 더 예쁘고 건강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너희들 앞에 돌아 올 테니. 그땐 내 몸과 마음의 통증도 훨씬 잦아들길 기대해본다.
(소반에 곱게 놓인 창틀위, 두개의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