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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Man Oct 04. 2023

여행의 이정표가 바뀌다 2

히맨の이탈리아 기행

그렇게 버스는 한참을 길 위에 서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10초쯤 버스 시간에 늦어 달려오던 학생을 그렇게 매정하고 단호하게 못 본척하던 운전기사였는데 불심검문을 하느라 길에서 30분 정도가 지체되었지만 천하 태평한 얼굴이었다. 승객 중에도 딱히 급해 보이거나 짜증을 내거나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 뒤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그렇게 한참을 느긋한 속도로 천천히 이동하여 나의 목적지인 산 안토니오라는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나와 함께 버스에서 내린 학생이 두 명쯤 더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이 근처에 뭔가 저녁 먹을 곳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여긴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조금 길을 걷다 보니 술집 같은 곳이 하나 보였는데 물어보니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시골 마을이었다.




 거기서도 숙소까지는 한 3km쯤 걸어가야 했다. 주위 풍경은 딱히 이국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넓고 넓은 지평선과 밭과 비닐하우스 그리고 내가 걷는 길이 전부였다. 주변엔 앙상하게 마른나무들과 농기계 따위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그것은 마치 여기가 이탈리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충남 예산이라던가 경기도 포천이나 혹은 파주 어디쯤인 것 같기도 했다. 날은 흐렸고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전부 길 위에서 보냈다. 그리고 저 멀리 드디어 고독한 나그네가 몸을 뉘일 숙소가 보였다. 지평선 아래 오직 한 채 덩그러니 있는 집이었다. 저택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제법 규모 있는 삼각형의 지붕으로 된 2층 건물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 건물과 얼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듯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주머니는 친절한 목소리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얼마 뒤에 자동차를 타고 나타났다. 사실 초인종을 누를 생각을 하기까지 30분 넘게 아무도 없는 집 주변을 서성거리며 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건물에는 사람이 없는 듯했고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아무튼 어렵게 어렵게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건물 1층에는 테이블이 대여섯 개 정도 있어서 게스트들이 아침식사를 할 수 있게 마련된 카페 테리어와 탕비실 리셉션과 창고 등이 있었고 1.5층과 2층에 객실이 역시 대여섯 개쯤 있는 것 같았다. 꽤 큰 대형 펜션 같은 건물로 야외에는 넓은 수영장도 있었지만 아직 이른 3월이었기 때문에 물을 빼두었었고 담배를 피우거나 쉴 수 있는 야외 테이블이 여러 개 있었지만 겨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했다. 사실 수영장 사진을 보고 이 숙소를 예약한 것이었는데 꽤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1층 거실 한쪽에 거대한 벽난로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집주인아주머니는 흰머리를 짧게 커트한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맑은 눈을 가진 당당한 체격의 여성이었다. 약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황야의 마녀가 연상됐지만 괴팍하거나 무서운 얼굴이 아니고 지혜롭고 현명한 인상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줄 알았는데 아주머니는 다른 게스트가 한 명 더 있다고 알려줬다.  오다가다 만난 그 다른 게스트는 영어를 전혀 안 하는 쌀쌀맞아 보이는 중년의 마른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두어 번 나를 마주칠 때마다 표정도 없었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도 나도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서로 대화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고 중요한 내용을 전할 때는 구글 번역기를 사용했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언어는 재료일 뿐 언제나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내게 필요한 정보를 모두 알려주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려 깊게도 내가 저녁식사를 했는지 물어보고 아직 식전이라는 말에 피자를 시켜주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런 시골에도 피자 배달은 가능한 것이 신기했다. 그녀는 다음날 일정을 내게 간단히 설명해 주고 돌아갔다. 저녁을 먹고 나니 펜션 1층에는 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내가 기대했던 시간이 왔다. 아무도 없는 이 고요한 시골집에서 벽난로를 피우고 불을 바라보며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 나는 제주도에 살고 있지만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벽난로가 있는 집은 언제나 크나큰 로망이었다. 심지어 혼자 밤에 집에 있을 때는 TV에 벽난로 영상을 틀어 두고 장작 타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거실의 그 거대한 벽난로가 마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고생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다 먹고 남은 피자 박스에 불을 붙여서 잔가지를 태우고 그 위에 장작을 올려 모닥불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내 생각대로 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연기가 굴뚝 방향이 아니라 집 안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아저씨이기 때문에 불 정도는 충분히 피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되질 않아서 당황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 건물의 모든 곳에 마치 불이 난 것처럼 짙은 연기가 꽉 차버렸다. 위층에 있던 여자가 내려와 뭐라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떠들어댔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건물 1층의 모든 문을 활짝 열고 벽난로 문을 닫아서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연시켰다.




위층 여자가 연락을 했는지 20분 뒤쯤 집주인 부부가 돌아와 "왓 헤픈?"이라고 말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아주머니는 마치 마녀가 마법을 부리듯 벽난로 문의 각도와 공기와 양을 조절하며 캘시퍼(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화염의 악마)를 진정시키고 곧 벽난로 안의 모닥불을 우리가 아는 그 모양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 집의 거대한 벽난로는 실 내외의 온도와 기압차를 잘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쉽게 보고 덤볐다가 온 집안을 거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집안에 연기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정리되는 데는 30분 정도가 소요 됐던 것 같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집주인 부부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마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주머니는 잘 마른 장작 몇 개를 난로 속에 집어넣고는 앞으로 불이 두세 시간쯤 더 지속될 거라도 말해줬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난로 안에 불을 활활 타올랐지만 연기는 조금도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불을 다루는 아주머니는 정말 프로페셔널하게 보였다. 그냥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이 타고 연기가 나는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내 공간에서 내가 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프로페셔널하게 진행하고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솔직히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날의 해프닝이 결국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드디어 벽난로 앞에 흔들의자에 앉아서 괴테의 여행기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조금 읽다가 피곤했는지 곧 의자 앉은 채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잠에서 깼을 때는 벽난로의 장작이 다 타버린 뒤였다. 나는 방으로 올라가 푹신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다음날 아침 8시 간단한 조식을 먹고 아주머니와 인사한 뒤에 집을 나섰다. 아주머니는 볼로냐도 괜찮은 곳이지만 베로나 역시 한번쯤 꼭 가볼 만한 아름다운 도시라고 내게 일러줬다. 그리고 주인아저씨는 나를 기차역까지 손수 운전해서 태워다 주셨다. 미란돌라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나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소박하지만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는 세상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집주인 부부의 관대함과 상냥함에 관해서 생각하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관대한지 돌아봤다.




그렇게 여행의 이정표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베네치아라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도달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사실 그날 하루 그렇게 재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레고 가슴 뛰는 만남도 없었다. 그렇지만 별것 아닌 것 같았던 그 하루에 길 위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들이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난다. 무심한 버스 기사 아저씨, 절박하게 버스를 쫓아오던 소년, 상냥한 얼굴의 베트남계 여성들, 나의 머리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골의 웨이트리스. 그리고 펜션의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소리들. 그 사람들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날의 추억을 나는 얼마나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생생히 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을 기억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들의 사연과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품어 두고 나는 그렇게 길을 틀어 셰익스피어의 도시 베로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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