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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Man Jul 04. 2023

여행의 이정표가 바뀌다 1

히맨の이탈리아 기행


원래는 피렌체에서 볼로냐로 이동하고 페라라를 거쳐 베네치아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실수로 인해 여행 경로가 크게 달라졌다.




아침 일찍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기차를 타고 볼로냐로 이동했다. 볼로냐 센트랄레 역에 도착해서 예약해 둔 숙소를 검색했는데 역에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80km라고? 내 눈을 의심하며 아고다앱에서 숙소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내가 예약한 숙소는 볼로냐 시내가 아니라 그로부터 서북 방향으로 정말 80km 이상 떨어진 머나먼 교외 지역에 있었다. 예를 들어 부산에 있는 숙소를 예약하고 부산역에 도착해 보니 부산 근처 마산에 숙소가 있는 격이랄까? 어떻게 이런 실수를.. 볼로냐 센트랄레역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숙소에 가려면 일단 기차를 타고 '모데나'라는 도시로 가야 한단다. 그리고 거기서도 버스를 두 번쯤 갈아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냥 쿨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이곳 볼로냐에 있는 다른 숙소를 잡는 게 현명해 보였다. 예약금은 10% 정도만 결제했기 때문에 설령 못 간다고 해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가는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생각하면 포기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이 작은 해프닝은 왠지 모르게 나의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것은 이 길에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기도 했다. -인용 전찬준 노래: 이 길은 어디로-




그런데 어찌 보면 내가 그렇게 딴생각을 품게 된 더 큰 이유는 볼로냐라는 도시에 오긴 했지만 이곳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딱히 궁금한 것도 없었고 그래서 여기에 반드시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조르조 바사니의 금테 안경이라는 소설의 배경이 볼로냐와 페라라였다는 점. 그리고 무라카미 류가 그의 에세이에서 말하길 볼로냐는 구두가 유명하고 단골로 가는 레스토랑에서 파는 고기 어묵이 맛있다고 했던 것 정도가 볼로냐에 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고기 어묵 맛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번 여행에서는 이탈리아 수제화를 살 형편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덤덤히 모데나로 가는 기차를 탔고 볼로냐에 도착한 지 30분 안 돼서 그 도시를 떠났다. 언젠가 볼로냐에 다시 가게 되면 그때는 멋진 이태리 구두 한 켤레를 살지도 모르겠다. 그 구두를 신고 고기 어묵을 파는 레스토랑에 가게 될지도.




 하여간 모데나에 도착해서 기차역 안에 있는  베트남계 여성들이 운영하는 카페 테리어에서 커피와 간단한 점심을 먹고 역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안내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컴퓨터로 한참을 이리저리 찾아보더니 일단 여기서 오후 1시에 출발하는 500번 버스를 타고 '까르피'라는 동네에 가서 다시 520번 버스로 갈아타고 '산 안토니오'라는 동네로 가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뭐라고 길게 덧붙여 설명해 줬는데 버스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520번 버스로 갈아타려고 한다는 얘기를 꼭 전하라는 말 같았다. 알아들었냐는 직원의 질문에 나는 "아마도, 하지만 확실히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라고 말하니 유리창안의 안경 쓴 젊은 여직원은 걱정스러운 표정과 다정함이 섞인 미소를 내게 건네며 행운을 빈다고 말해줬다.




아무튼 그녀가 안내해 준 데로 오후 1시에 500번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에는 탔던 사람은 전부 학생들이었다. 나만 이방인처럼 보였는데 학생들도 나도 안 보는 척하면서도 가끔씩 서로 힐끔거렸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을까? 관광지인 로마와 피렌체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불안과 걱정 그리고 기대, 나는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그런 화려한 세상에서 벗어나 이런 남루하고 밋밋한 길 위에 서있었다. 볼거리가 너무나도 많았던 로마와 피렌체가 마치 트랜스포머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였다면 시골길을 달려가는 흔들리는 로컬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지루한 독립영화 같았다. 예쁘지 않은 앵글이 좋은 앵글이라고 말했던, 파리에서 영화를 찍어도 에펠탑 한 번 등장시키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어느 감독의 무심한 영상들처럼 꼭 두오모 성당이나 콜로세움 같은 대단한 무엇인가가 등장하지 않는 우리의 평범한 삶도 얼핏 보면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오후 2시 15분에 까르피에 도착하자 버스에 가득 있던 학생들은 이미 다들 어디에선가 내려 사라졌고 버스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내가 내린 곳은 마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마을처럼 황량하고 색채가 없었다. 정류장에는 520번 숫자가 표시된 철기둥 하나만 달랑 있었는데 부스는커녕 벤치도 없었다. 좀 더 떨어진 곳에 다른 버스 번호가 적힌 기둥이 예닐곱 개 정도 더 있을 뿐이었다. 버스 종점처럼 처량하고 쓸쓸한 곳이 또 있을까?




 철기둥 아래 깨알 같은 글씨로 버스 시간표가 적혀 있었는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내가 갈아타야 할 520번 버스는 15분 전에 떠났고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4시간을 이 황당한 정류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더군다나 내가 이 시간표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도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버스가 확실히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버스 정류장 기둥 아래에는 학생 몇 명이 그냥 바닥에 앉아 있었다. 땅바닥에 앉아 저렇게 기다린다고? 아무리 시골이라도 여기는 유럽의 이탈리아 아닌가? 그 모습은 마치 인도의 어느 버스정류장 풍경 같았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우선 주변에서 뭔가 먹을 것을 파는 곳을 찾아봤다. 다행히 길가에 딱 한 군데 카페가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지나서 주방은 문을 닫았다고 하여 음식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이날은 이미 피렌체에서, 볼로냐에서, 모데나에서 각각 한 잔씩 커피를 3잔이나 마셨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컵에 담긴 과일을 주문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내가 가려는 곳을 모바일폰으로 보여주며 520번 버스가 몇 시에 오는지 정확히 알려 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검색해 보니 그 카페에서 숙소까지 거리는 16km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걸어가는 시늉을 하자 카페 직원들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 버스가 정말 4시간 뒤에 온다면 그 사이에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는데 버스 시간이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선뜻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행인지 어떤지 내가 본 버스 시간은 잘못된 것이었다. 520번 버스는 4시 15분에 온다고 뒤늦게 카페 여직원이 알려주었고 나는 두 시간을 기다려 겨우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하여 정확한 시간에 출발했다. 어떤 학생이 버스가 출발한 뒤에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쫓아 딱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지만 흰머리의 운전기사 아저씨는 사이드 미러로 그 학생의 절박한 표정을 빤히 보면서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버스를 타지 못한 저 학생은 저기서 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아저씨는 버스를 세우지 않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탈리아 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가는 도중에 버스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갑자기 멈춰 서더니  공무원인지 버스회사 직원들인지 모를 남자 몇 명이 우르르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승객들을 상대로 일일이 티켓 검사를 했다. 희한하게도 이탈리아에서는 운전기사는 운전만 하지 승객들 표를 받거나 검사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현금으로 운전기사에게 티켓을 끊었었는데 설령 티켓을 끊지 않아도 버스에 탈 수는 있었다. 아마도 로마의 지하철 티켓이나 정액권 같은 현금 말고도 버스를 탈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불심검문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너무 허술해 보여서 한 번쯤은 그냥 외국인이라 몰랐다고 말할 심산으로  무임승차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버스에는 생각보다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불심검문을 했겠지. 그러면 애초에 무임승차를 하기 어렵게 시스템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참 이탈리아 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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