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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Man Jun 27. 2023

피렌체에서 독일신발을

히맨の이탈리아 기행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나는 검은색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크록스는 가볍고 편하고 유용한 신발이었지만 오래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나는 우선 시내 중심가를 구경하면서 적당한 신발을 구입할 생각이었다. 예약한 호텔은 기차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어렵잖게 숙소를 찾을 수 있었고 체크인을 하기 위해 리셉션 직원에게 "차우"라고 인사했다.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직원은 곁눈으로 나를 흘깃 보더니 "본 조르노"라고 격식 있게 대답했다. 나는 순간 약간 머쓱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호텔에서 외국인이 대뜸 "안녕"이라고 인사하면 좀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로마에서는 줄 곳 호스텔에만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에서는 혼자 편히 쉴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었는데 방 컨디션이 기대보다 훌륭했다. 로마에서 이 정도 방을 구하려면 최소 80~100유로 정도는 필요했지만 피렌체에서는 그 절반 정도면 가능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와 아까 그 직원에게 다가가 쇼핑을 하려면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어봤다. 직원은 시내 지도를 펼쳐 보여주며 피렌체의 명소들과 쇼핑 지역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나에게 정확히 뭘 사려고 하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shoes"라고 대답하고 신고 있던 크록스를 보여 줬다. 신발이 그것뿐이냐?라고 물어보길래 그렇다고 하니 직원은 크록스와 내 얼굴을 번갈아보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I hope, you'll find good one."이라고 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슬리퍼를 신고 집에서 9000km가 넘게 떨어진 유럽에 와있는 이 철없어 보이는 아시아인이 충분히 이상스럽게 보였을 것 같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에게 "본 조르노"라고 격식 있게 인사했는데 그는 "챠우"라고 대답했다. 역시 이탈리아인은 알 수 없구나라고 다시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굿 이브닝"은 이탈리아어로 뭐라고 하는지 물어봤다. 그는 잠깐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보나세라"라고 대답했다. '보나세라', 오늘 저녁에 써먹어야겠군' 하고 생각하며 호텔을 나섰다.




시내 중심가로 가는 입구 거리에는 가죽 공예품을 파는 노점들이 엄청나게 늘어서 있었다. 가방, 재킷, 지갑, 벨트 등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로 염색된 수많은 가죽 제품들의 특유의 고약한 냄새와 함께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역시 가죽 산업이 매우 발달한 나라이고 그중에서도 피렌체의 가죽공예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특별했다. 노점상들을 지나고 나니 작은 공방들에서부터 고급 부티크들까지 상점들에서는 저마다 아름다운 가죽 제품들을 휘황찬란하게 진열해 두고 있었다. 로마에서도 사고 싶은 것이 참 많았는데 피렌체는 그야말로 쇼핑 천국이었다. 상점들에서는 가죽 제품들 말고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셔츠나 넥타이 스카프 등을 팔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국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물건들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여자 옷만큼이나 남자들을 위한 옷과 액세서리들도 상당히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신발을 사야 했다. 그래서 어렵지만 다른 물건들의 유혹들을 뿌리치며 우선적으로 신발들을 둘러봤다. 벌써 여기저기에서 매혹적인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 내게 필요한 신발이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사실 나는 알 지 못했다. 그래서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글로벌한 스포츠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서 스니커즈나 바스켓 혹은 에어조던이나 에어맥스 같은 운동화를 구경하기도 했다. 일단 많이 걸어도 편안하고 비가 와도 신을 수 있는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신발이 필요했다. 그러나 또 이탈리아에 왔으니 아무래도 이탈리아 가죽으로 된 신발이 사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보기에 엘레강스한 가죽 구두나 이탈리아 수제화들은 오래 걷거나 여행할 때 신기에는 영락없이 불편해 보였다. 부드러운 스웨이드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들도 내구성이 약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가죽 샌들 브랜드인 버켄스탁 매장에서 검은색 부츠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발견한 그 신발은 우선 튼튼해 보이지만 너무 두껍지 않은 가죽이 발목 위로 올라오는 하이탑이었는데 거의 군화처럼 생겼지만 밑바닥은 우리가 아는 그 버켄스탁의 샌들 바닥 소재로 되어 있어서 가볍고 날렵해 보였다. 그리고 얇고 긴 신발 끈을 발목까지 팽팽하게 조일수 있어 거친 길에서도 발목이 안전하고 편안할 듯했다. 더군다나 그것은 지금 내 검은색 겉옷들 과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격은 188유로라고 쓰여있었지만 가격표 위에 X 표시가 되어 있었고 144유로로 할인을 하고 있었다. 한국 돈으로는 20만 원이 넘는 가격이니 제법 값나가는 신발이었다. 괜찮아 보였지만 그래도 가격 때문에 약간 망설여졌다. 로마에서도 꽤 맘에 들어서 사려던 신발이 있었는데 그 신발은 불과 70유로 밖에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신발 밑창에 'Made in Tunisia'라고 적힌 걸 보고는 굳이 이탈리아에 와서 튀니지 신발을 사야 하나라는 생각에 구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굳이 이탈리아에 와서 독일 신발을 사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매장에 들어가서 신어 보고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왔다. 나는 작은 물건을 살 때도 꽤나 신중한 편인데 특히 신발처럼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물건을 살 때는 더욱더 그렇다. 나는 일단 피렌체 시내를 한 바퀴 돌며 다른 물건들도 살펴볼 생각이었다. 하루쯤은 더 크록스를 신고 다녀도 상관없었다. 더군다나 피렌체는 로마보다는 훨씬 작고 아담한 도시였다. 나는 마음속에 검은 부츠를 잠시 밀어 넣고 정취 있는 피렌체의 골목상점들을 산책하듯 탐험했다. 역시 피렌체는 기대했던 것만큼 멋진 곳이었다. 골목길을 돌아 눈앞에 느닷없이 두오모 성당이 나타났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인상적으로 봤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보았던 바로 그 두오모였다. 그 영화는 지금 보면 약간 촌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당시 나는 영화에 나왔던 진혜림이라는 여배우를 좋아했었고 특히 그 영화의 O.S.T를 참 많이 들었었다. 바로 그 두오모 성당이 갑자기 불쑥 눈앞에 나타나니 그 상황이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성당 앞에서는 트럼펫과 트롬본, 색소폰과 만돌린으로 이루어진 5인조 밴드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는데 트럼펫을 부는 아저씨는 뚱뚱했고 트롬본을 부는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가 메가폰으로 노래 부르는 모습이 참 흥겨웠다. 밴드 구성원 모두가 아주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그 음악들은 피렌체의 풍경과 너무나 조화로웠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동전 몇 개를 기부하고 슬슬 배가 고파져서 성당 뒷골목에 있는 피자집에 들어갔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모차렐라치즈와 토마토소스 위에  파프리카와 버섯, 신선한 올리브와 파슬리가 올라간 채식 피자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이탈리아에 산다면 채식만 하며 살 수도 있을 갓 같았다. 다음날 소시지가 잔뜩 들어간 육식 피자를 먹기도 했었지만 이날 먹은 피자가 피렌체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내가 피렌체에 도착한 날은 정확히 음력 2월 15일로 만월이 뜨는 밤이었다. 밤이 되자 보름달이 시야에 나타났고 나는 아르노 강가를 거닐며 달빛을 비춘 낭만적인 그 도시를 감상했다. 피렌체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뭐랄까. 혼자서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걷고 있자니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골목길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나게 음악을 연주했지만 그 음악 역시 왠지 모르게 구슬프게 들렸다. 상점들을 지나자 스테이크를 파는 레스토랑과 와인바들이 끝없이 나타났고 달콤한 캔디 가게나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젊은이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다 느닷없이 놀이공원도 아닌데 요란한 불빛의 회전목마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풍경은 마치 환영처럼 느껴졌다. 이건 뭔가 진짜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다가 어느 신발가게에서 아까 그 봤던 그 신발과 똑같은 제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닮은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똑같은 제품이었는데 가격이 달랐다. 219유로. 그 가게에서는 내가 그 신발을 처음 발견했던 상점보다 그 신발을 무려 75유로나 비싸게 팔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처음 갔던 그 신발가게에 다시 가보았다. 쇼윈도에 144유로라고 할인 전시되어 있던 그 신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뿔싸! 그 신발가게 주인은 아마도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30만 원짜리 신발을 20만 원에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었지만 내 눈을 믿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더 나은 게 없는지 두리번대고 망설이다가 결국 좋은 신발을 좋은 가격에 살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에 들어가 주인에게 어제 여기 전시되어 있던 신발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여자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 신발을 꺼내 주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신발은 쇼윈도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직 있었다. 나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혹시나 해서 가격을 확인했는데 주인은 정확히 144유로를 결제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가격이었는데 어제는 몰랐지만 오늘은 알았다. 이 신발이 '내 것'이라는 것을. 젊은 날에는 가끔 연애할 때도 그럴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가질 수 있을 때는 그 가치를 모르고 의심하다 어리석게도 떠나거나 헤어질 지경이 되어서야 저 사람이 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물들도 때론 그렇다. 결제하면서 여주인에게 이탈리아에 와서 독일 신발을 사게 됐네요.라고 말했더니 주인은 웃으며 심지어는 독일인들이 와서 사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누구나 보기에 멋진 물건 혹은 장소라고 해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때 내게는 피렌체와 이탈리아 가죽 제품이 그랬다. 그것들은 그때 내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고 장소였다. 나는 그 아름답고 우아한 도시를 이틀 만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괴테도 그의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로마에 대한 기대와 갈증때문에 피렌체에는 고작 세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나중에 백패커가 아니라 좀 더 다른 상황, 이를테면 비지니스 라던지 아니면 연인과 함께 로맨틱 홀리데이를 오게 된다든지 하게 된다면 피렌체는 훗날의 나와 우리에게 잊지 못할 낭만적인 시간을 선사해 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왔을때 올라가고 싶어서 두오모 성당도 아껴두었다. 두오모는 연인들을 위한 성지라 하지 않던가?


그날 밤 나는 새로 산 신발을 신고 로마에서 구입한 새하얀 셔츠를 입고서 피렌체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티본스테이크와 치즈와 토마토가 곁들여진 루콜라 샐러드. 그리고 오븐에 구운 감자를 주문했다. 나는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식들과 함께 레드 와인을 마시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가 만족하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다 내게 아는 체를 했다. 체크인할 때 만났던 호텔의 매니저였다.




"you finaly found new shoes!" 그는 내 신발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고 나도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You are the best dresser in this city!" 그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다시 말했고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인사했다.




"보나세라!"




음력 2월 16일, 저녁

보름달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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