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보다 먼저, 아이의 마음을 듣기로 했다
“여보, 오늘 놀이터에서 어떤 엄마가 우리 애가 왜 그렇게 말을 잘하냐며 깜짝 놀라더라.”
“여보, 영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리 애가 수업시간에 제일 먼저 손 든대.”
“여보, 그 집 아이는 아직 말을 잘 못해서 친구를 자꾸 때린대.”
“여보, 그 엄마는 책을 한 권도 안 읽어준다더라.”
첫째가 또래보다 조금 앞선다는 사실은 내게 묘한 안도감과 짜릿한 자부심을 동시에 줬다. 그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자랑처럼 늘어놓으며, 속으로는 ‘우린 잘하고 있구나’ 하는 자기확신에 취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느리게 보일수록 괜히 마음이 놓였다. 그때의 나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마음인지 몰랐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어김없이 내 말에 제동을 걸었다. “자만하지 마. 다른 집도 다 사정이 있는 거야. 우리 아이도, 그 집 아이도 앞으로 어떻게 클지 아무도 몰라. 당신이 한 말, 그대로 우리한테 돌아올 수도 있어.”
그때는 몰랐다. 칭찬과 비교가 언젠가 나를 찌를 날이 올 거라는 걸.
‘그냥 말 많이 걸어주고, 책도 자주 읽어줬어요.’ 부러움 섞인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쉬운 일을 꾸준히 했을 뿐인데, 첫째는 말을 잘했다. 심지어 영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그 ‘쉬운 일’을 둘째에게는 해주지 않았다. ‘알아서 크겠지’ 하고 넘겼다. 그 결과, 내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왔다. 비수처럼.
둘째는 19개월이 될 때까지, 배가 고파도, 졸려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챈 이후, 나는 둘째를 유심히 지켜봤다. 언제 눈을 마주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하루 종일 둘째의 표정과 몸짓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내 그 침묵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와의 ‘상호작용의 부재’였다.
첫째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나를 불렀다. 같이 놀자, 같이 먹자, 같이 자자. 나는 온종일 첫째의 요구를 따라다녔다. 그 사이 둘째는 조용히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결국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둘째의 작은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를 위해 틀어둔 영어 영상 앞에 둘째도 늘 함께 앉아 있었다. 화려한 색감, 쉴 틈 없는 소리, 빠르게 바뀌는 장면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자극적인 세계였다. 나는 그저 둘째가 얌전히 앉아 있는 걸 편리하다고 여겼다. 둘째의 표정은 살피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는 끊임없이 말이 쏟아졌지만, 둘째의 세상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마음이 오고가지 않으면, 마음의 문도 서서히 닫힌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둘째는 이름을 부르면 눈을 맞췄고, 가리키는 물건을 함께 바라볼 줄 알았다. 청각도, 시각도 또렷하게 반응했다. 그러면 남은 건, 언어였다. 세상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말의 통로가, 엄마와 둘째 사이에서는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지인의 아이가 오랫동안 언어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곧장 찾아갔다. 그 엄마는 여러 병원과 센터를 다니며 배운 것들을 자세히 알려줬다.
“괜찮을 거야. 말 늦게 트이는 애들 많아. 지금은 너무 어려서 검사도 안 돼.”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솔직히 그땐 ‘문제가 있다’는 진단보다 ‘괜찮다’는 말이 더 듣고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전문가의 조언을 구했어야 했다.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나를 기다리던 둘째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언어 자극을 위한 놀이 방법, 필요한 도구들, 그리고 말이 늦은 아이들의 사례도 찾아봤다. 불안과 안도 사이를 오가며 며칠 밤을 뒤적이다가, 언어치료사들이 만든 《생각이 크는 언어치료》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을 늘 테이블 위에 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림을 보며 둘째와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이건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어디에서 일할까? 학교에서 일해. 의사는 병원에서 일해.”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둘째의 눈을, 표정을, 손끝을 살폈다. ‘이건 이해했구나. 이건 모르겠구나.’ 둘째는 그렇게 눈빛으로, 손짓으로, 앙다문 입술로 소심하게 의견을 전해왔고, 나도 점점 둘째와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하루 한 시간씩 둘째만을 위한 놀이 시간도 만들었다. 처음엔 막막했다. 둘째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단어카드를 보여주고,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접고, 책을 읽어줬다. 말 한마디 없는, 반응이 오지 않는 놀이는 생각보다 버거웠다. 그 침묵이 너무 깊어서, 어느 날은 그 속에 나도 잠겨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다음 날엔 또다시 책을 펼치고 둘째에게 말을 건냈다. 둘째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한 달쯤 지났을까. “눈 어디 있지?” “코는 어디 있지?” 묻자, 둘째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눈과 코를 가리켰다. 기쁨보다 미안함이 먼저 밀려왔다. 두 살짜리 아이에게 이제야 눈과 코를 가르치다니.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 걸까.
밤마다 남편이 동화책을 읽어주고, 나는 둘째에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건네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세 달쯤 지나자, 드디어 둘째의 입에서 단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하는 단어는 손에 꼽았지만 하루하루 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아빠’는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엄마’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집에서였다. 막 텃밭에서 따온 채소들이 식탁에 가득했다. 나는 둘째를 안고 초록 고추를 가리켰다.
“이건 고추야. 초록색 고. 추.”
둘째의 눈이 고추를 향했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페퍼?”
순간, 온몸이 멈췄다.
“페퍼? Pepper? Pepper라고 말한 거야?”
둘째의 눈빛으로 맞다고 대답했다. 남편을 불렀다. “여보, 우리 애가 고추를 보고 페퍼라고 했어요.”
그토록 기다리던 ‘엄마’가 아닌 첫 영어 단어, ‘Pepper’였다.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왜 둘째 입에서 영어가 나왔을까. 가르친 적도 없는데, 왜 하필 영어였을까. 그날 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둘째의 말이 느린 이유, 그리고 가르치지 않은 영어가 입 밖으로 나온 까닭을 곱씹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둘째의 힘듦을 먼저 알아보겠다고. 언어든, 몸짓이든, 눈빛이든 — 그 어떤 방식으로라도, 나는 둘째의 말을 놓치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