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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영어의 끝, 말보다 마음

마음이 통하자, 언어도 통하기 시작했다

by 임지혜

모국어가 느린 23개월 둘째의 첫 영어 발화.

“Pepper(고추).”

그 순간부터 나는 다시 아이를 세심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른 영어도 알고 있을까?’ 미술 놀이를 하던 중,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색연필을 가리키며 물었다.

“What color is this?”

아이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Blue.”

아이는 내가 집어 드는 12색 색연필의 색을 하나하나 또렷하게 말했다. 영어로. 하나씩 색을 말할 때마다 나는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자신이 이해한 질문,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엄마가 알아들었다는 사실. 그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세상과 자신 사이를 막고 있던 두꺼운 유리가 깨지듯, 아이는 그 빛을 온몸으로 받았다.

둘째는 처음으로 언어를 통해 누군가와 뜻을 주고받는 기쁨을 알게 된 듯했다. 그 벅찬 감정이 얼굴 가득 번졌다.


둘째는 이미 색깔, 모양, 과일 등 간단한 단어를 영어로 알고 있었다. 모국어로 말할 때는 서툴고 조심스러웠지만, 영어로는 놀랄 만큼 정확하고 또렷하게 발음했다. 말할 수 있는 한국어 단어는 스무 개 남짓, 영어 단어는 쉰 개가 넘었다.

둘째의 언어 지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과도한 영어 영상 노출, 그리고 턱없이 부족한 모국어 노출. 둘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미래를 위한 영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관심과 따뜻한 눈빛, 그리고 마음이 담긴 대화였다.

이제는 내가 새롭게 다가가야 했다. 둘째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이 서로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줘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나는 발음도 문법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저 마음을 담아 둘째에게 영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Wanna ride on slide? (미끄럼틀 탈래?)”

“Do you know what it is? (이게 뭔지 알아?)”

장소에 상관없이, 나는 어설픈 발음으로 말을 걸었다. 때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건 둘째와 나, 서로의 마음이 닿는 단 하나의 언어였으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세상의 시선은 잠깐이지만, 이 아이는 내가 평생 지켜야 할 존재야.’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자 둘째의 언어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자라났다. 신기하게도 모국어도 그 흐름을 함께 탔다. 이미 영어로 익혔던 단어들을 한국어로 알려주자, 금세 이해하고 따라 말했다.

“This is an apple. 우리말로는 사과야. 사과.”

손꼽아 기다리던 ‘엄마’도 ‘Mommy’가 우리말로 ‘엄마’라는 걸 알려주자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곧, 조심스레 “Mommy”를 부르던 둘째는 자연스럽게 “엄마”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둘째의 감정 표현은 눈에 띄게 풍부해졌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걸 깨닫자,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망설임 없이 드러냈다. 나는 종종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사람이 감정을 이토록 온몸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말을 배운다는 건, 단지 단어를 익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과 마음을 잇는 첫 번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찾아가는 둘째를 보며, 나는 매일 감격했고 조금씩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 바뀌고 한때 침묵 속에 머물던 둘째는 이제 또래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평범한 일곱 살이 되었다. ‘엄마’ 한마디를 기다리던 날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둘째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엄마!”를 부른다.

“오늘은 엄마 소리 100번만 하자, 귀가 터지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고마웠다


모국어든 영어든, 결국 중요한 건 언어의 겉모습이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고자 한 진심, 그 하나면 충분했다. 느렸고, 달랐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의 마음에 닿았다.


그렇게 둘째는 말을 배웠고, 나는 다시 ‘듣는 법’을 배웠다.

언어는 달라도, 마음의 언어는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걸 그 아이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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