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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임지혜의 오늘

82년생 김지영의 시대를 지나, 나로 산다

by 임지혜

아직 우리 또래는 나이를 기준으로 호칭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저는 빠른 82년생이에요.” 그리고 덧붙인다. “빠른이라 좀 애매하죠? 편한 대로 대해요. 친구도 좋고, 언니로 대해도 좋아요.”


《82년생 김지영》이 세상에 나온 2016년, 나는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혼준비까지 병행하던 시기였으니 책 한 권 펼칠 여유조차 없었다.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그 무렵 나는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문화생활은커녕 편안한 잠 한 번 자는 것도 사치였다.


아이를 키우며 육아서를 탐독하고, 교육서를 전투적으로 읽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존을 위한 독서가 아닌 쉼을 위한 책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남주 작가의 《네가 되어줄게》를 먼저 읽었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 《82년생 김지영》을 집어 들었다.

누군가에겐 소설이겠지만, 나에게는 일기장이었다.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새 눈가가 젖었다. 김지영의 삶은, 빠른 82년생 임지혜, 그러니까 나의 삶과 너무 닮아 있었다.

우리의 출발선은 비슷했다. 아들 위주의 가족 안에서 자신의 서러움을 딸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 애쓰는 어머니들 덕분에, 김지영과 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주인공 김지영이 첫 직장에서 남자직원들만 팀원으로 뽑은 장면을 읽을 때, 숨이 턱 막혔다. 인사권자는 사장이었고, 사장은 출산으로 자리를 비울 가능성이 큰 여자 대신, 오래 일할 남자들을 택했다. 그들이 오래 일할 수 있도록 까다로운 고객은 여자에게, 쉬운 고객은 남자에게 맡겼다. 월급도 남자가 많았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나 역시 9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같은 현실을 마주했다. 연차에 따라 진급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지만, 마지막 3년 동안 나는 진급 명단에서 빠졌다.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업무량을 소화했고, 야근은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진급은 늘 남자직원의 몫이었다. 세 번째 진급에서 제외된 날, 가슴이 요동쳤고, 나는 조용히 사직서를 꺼냈다.

“혹시 진급이 안 돼서 그만두는 거야?”

“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내년에 꼭 진급시킬게.”

“내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지금 그만둘게요.”

그렇게 나는 깔끔하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났다. 그쯤이면,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일을 잘하는 게 전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회사에서는 ‘여자’라는 조건이 나를 따라다녔다.

퇴사 석 달 전, 같은 팀에서 일하던 차장님이 이직했다. 그는 마지막 날,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넸다.

“임 대리, 내 일까지 떠넘기고 가게 돼서 미안해. 그런데 꼭 해줄 말이 있어. 이번에도 진급 못 할 거야. 너 일 열심히 하는 거 윗사람들도 다 알아. 그래도 안 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시키는 것만 해.”

그 말이 그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진급하겠어?’ 싶었다. 하지만 3개월 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나보다 일이 적었던, 부서장과 자주 당구를 치러 다니던 남자직원이 과장이 됐다.

임신과 출산을 세 번 반복한 타 부서의 여직원은 진급했지만, 결혼도 안 한 나는 밀려났다.

부서마다, 상사마다 기준이 달랐던 시절이었다. 어떤 곳에선 ‘여자’라는 조건이 여전히 벽이었고, 어떤 곳에선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 과도기의 한가운데서, 9년을 바친 회사를 초라한 퇴직금과 함께 떠났다.


임신 준비를 하려는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이 남편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도, 친구도, 다 잃을지 몰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남편은 답했다.

“그래. 부양. 책임감이 커질 거야.”


그 장면을 읽던 평일 낮, 커피 한 잔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아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에, 남편은 맞은편에서 재택근무 중이었다. 남편에게 문득 물었다.

“여보, 왜 우리 큰애 낳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죠? 내가 일과 육아를 병행할 선택지는 없었나요?”

남편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아이는 우리가 직접 키우자고 했잖아. 네가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고도 했고. 그리고… 빚이 없었으니까. 나 혼자 벌어도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맞는 말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는 내가 부러울 때는 없었어요?”

남편은 내가 읽는 책 제목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부럽진 않아. 다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압박은 있어.”


우리는 이미 지나간 일들을 이제야 다시 꺼내놓고, 조금 늦은 대화를 나눴다. 소설은 특별한 결말 없이 끝났지만, 그래서 더 현실 같았다. 김지영은, 그리고 나 임지혜는 그렇게 현실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지영과 나, 남편과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주어진 몫을 살아가고 있다. 다만 그 몫이 언제나 공평하지는 않았다는 걸 안다.

요즘도 가끔,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다. 여전히 나는 답을 찾는 중이다.


회사를 그만둔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동일한 업무를 이어갔다. 1년 뒤에는 결혼했고, 곧바로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알린 날, 인사팀 직원이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대리님, 임신 축하드려요. 이건 알아두시면 좋을 내용이에요.”

그는 준비된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단축 근무는 하루 2시간 가능하고, 육아휴직은 3개월, 출산휴가는 1년까지 쓸 수 있어요. 산부인과 검진은 연차 없이 가실 수 있고요….”

낯설고 서글펐다. 9년 동안 함께 일했던 전 직장에서는 그런 제도를 제대로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아이 봐야 해서 먼저 가요”라며 야근과 회식을 앞두고 눈치 보던 모습만 선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임신한 직원이 처음이라며 인사팀 직원은 관련 법을 찾아봤고, 사장님께도 미리 알렸단다. 그 말이 고마웠다. 언젠가 만날 그의 아내도 이 제도를 꼭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 깨달았다. 변화는 거대한 구호가 아니라, 작은 누군가의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내 선택이 누군가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초기엔 자도 자도 잠이 부족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깜빡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오후 세 시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막달에는 출퇴근이 힘들어 단축 근무를 썼다. 출산을 앞두고는 휴직계를 냈고,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년을 마친 뒤 사직서를 냈다. 퇴직금은 생각보다 넉넉했다. 휴직 기간이 근무일로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출산휴가를 쓰는 여직원이 못마땅했다. 그들의 일까지 처리해야 하는 내 힘듦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무지였고 미성숙함이었다. 남자들은 그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싶다. 자신의 아내가 존중받길 바라면서도 직장 내 다른 여성에겐 묵묵히 본인의 몫을 감당하길 바라는 그 모순을.


사람은 자기가 겪은 만큼만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누군가의 이야기를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한때는 카페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엄마들이 한가롭게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한숨을 길게 내쉰 날 비로소 알았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짐을 조용히 품은 채 하루를 버티고 있었는지를.


나는 이 사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겪었고, 또 여자이기에 보장된 권리를 받았다. 그 모든 경험은 나를 단단하게도, 조심스럽게도 만들었다.

삶은 여전히 벅차고, 때로는 불공평하다. 앞장서서 세상을 바꾸려 애쓰지는 않더라도, 다음 세대가 숨 쉴 틈은 만들어 주고 싶다. 내 딸들이 자라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억울함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작은 선택들을 이어가려 한다.


세상엔 여전히 수많은 김지영이 살아가고 있다.

그 이름들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임지혜’로 살아가고 있다.

내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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