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등학생에게 배우는 ‘최선의 노력’

《5번 레인》 속 아이들에게서 나를 보다

by 임지혜

우연히 도서관 아동책 코너에서 만난 《5번 레인》은 아이가 아닌, 나를 위한 책이었다. 난이도 높은 책들에 지쳐 있던 내게 이 책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맞아, 책 읽는 일은 원래 즐거운 일이었지.’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수영부 아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내 학창 시절과 지금의 삶이 함께 물 위로 떠올랐다.


내 마음을 오래 붙잡은 인물은 정태양이었다.

그는 수영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수영부에 들어간 아이였다.

“한 번쯤은 나도 제대로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더 늦기 전에. 이대로는 아쉬워요.”

그 한마디에 이 아이의 마음이 다 담겨 있었다.

실력만으로 수영부 입단 테스트를 통과한 정태양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고, 투정 한마디 없이 힘든 연습을 견뎠다. 매일 가장 먼저 학교 수영장 문 앞에 도착하던 아이. 과학자도 되고 싶어 하고, 수영선수도 되고 싶어 했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둘 다 최선을 다해보려는 열세 살 소년이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에 큰 흥미도, 특별한 목표도 없었다. 한글을 막 뗀 뒤부터 읽는 건 좋아했지만, 노력보다는 이해력에 기대어 버텼다. 수능에서도 딱 아는 만큼의 결과를 받았다. 큰 뜻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보통의 또래들처럼 점수에 맞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교 3학년, 선배의 소개로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 앞 단골집이었다. 오므라이스와 돈가스를 저렴하고 푸짐하게 내는 곳이라 늘 붐볐다. 첫 아르바이트였지만 금세 적응했다. 사장님 부부를 자연스레 ‘이모’, ‘이모부’라 불렀고, 그들은 “성격 좋은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다”며 웃었다.

‘한가한 시간대라 편할 거야’라던 선배의 말과 달리, 손님은 점점 늘었다. 접시를 겹쳐 들고 테이블 사이를 뛰다시피 했다. 몇 달 뒤 내가 그만둔 후, 새로 들어온 알바생이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자, 그 시간대에는 결국 알바생을 두 명씩 쓰게 됐다고 했다.

‘그땐 참 열심히 일했지. 남의 돈 받는 게 어디 쉬운가.’

하루 세 시간 남짓한 단순한 서빙이었지만, 그 속에서 내 쓸모가 확인되는 기분이었다.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인데도, 내가 제법 잘하는 것도 있고 참을성도 있다는 사실이 은근한 자부심으로 남았다. 괜히 웃음이 났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몇 번 가본 학교 근처 바(Bar)였다. 손님으로 앉아 있을 때와는 달리, 일하는 사람이 되자 내게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명찰에는 ‘제리’라고 적혀 있었고, 모두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톰과 제리의, 그 제리였다.


함께 일하던 ‘톰’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덩치가 크고 샛노란 머리를 한, 단번에 눈에 띄는 여자애였다. 1년째 일하고 있는 베테랑이었고, 틈만 나면 칵테일을 만들거나 칵테일 쇼를 연습했다. 단순히 오래 일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새 학기가 시작되면 휴학하고 이 바의 체인점을 차릴 거라 했다. “이게 내 길이에요.” 톰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성실함에는 자신 있었지만, 이곳의 일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낯설음이 컸다. 메뉴판을 가득 채운 칵테일 이름들이 낯설었고, 양주의 종류는 그보다 더 많았다. 간신히 외워 주문을 받아도 매니저에게 제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보는 칵테일과 이름을 기억해내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나는 퇴근길에 메뉴판을 하나 빌려 집으로 가져왔다.

“손님이 뭘 주문해도,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름이라도 익혀두려고요.”

매니저는 잠시 나를 보더니 웃으며 메뉴판을 내주었다. 그날부터 집에 돌아오면 메뉴판을 펼쳐놓고 칵테일 이름을 하나씩 익혔고, 검색으로 찾은 사진과 매치해 보았다.

칵테일과 술 이름들에 익숙해질 즈음, 이번에는 안주까지 맡게 됐다. 모둠과일, 마른안주, 오징어구이, 소시지구이…. 조리라기보다는 조합에 가까운 메뉴들이었지만, 처음엔 늘 뭔가 하나씩 빠뜨렸다.

그래서 또 내 방식대로 방법을 만들었다. 흰 종이에 접시를 그리고, 그 위에 재료들을 색연필로 그려 넣었다. 그 아래에는 메뉴 이름을 적었다. 그렇게 만든 나만의 메뉴판으로 주방 벽을 채웠다. 졸업 전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도 그 종이들은 여전히 주방에서 나를 맞았다.

그때의 나는 단지 덜 당황하고 싶었고, 빨리 익숙해지고 싶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바로 나다운 최선이었다.


누군가는 미래를 꿈꾸며 한 걸음씩 나아가던 그곳에서,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오늘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애썼다. 덜 당황하고, 조금 더 익숙해지고 싶었던 마음.

서툴고 부족했지만, 그때의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keyword
이전 10화82년생 임지혜의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