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알아가는 시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나는 그냥저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두뇌, 보통의 체력, 보통의 성격. 특별히 모나지도, 특별히 빛나지도 않았다. 주목받는 것도, 누구에게 민폐 끼치는 것도 싫어하는 나에게 그건 꽤 편한 삶이었다.
출근하면 시키는 일 하고, 퇴근하면 좋아하는 걸 했다. 좋아하는 일엔 몰두했고, 흥미가 식으면 미련 없이 손을 뗐다. 될 때까지 해보는 건 좋아하지만, 안 되면 깔끔히 포기하기도 했다.
무난한 인생이었다. 나 하나만 책임지면 되는, 리더십도 카리스마도 필요 없는 삶. 보통의 체력으로도 충분히 버틸 만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낳고 키우기 시작하니, 평범하다고 믿었던 내 모든 조건이 무너졌다.
연년생 육아 앞에서 ‘평범함’은 무기력함이 되었고, ‘무난함’은 무능함이 되었다. 다른 엄마들은 잘만 하는데 왜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소리를 지르는지, 왜 놀아주는 일조차 체력의 벽에 부딪히는지 알 수 없었다.
힘들었다. 그 힘듦이 내 탓인 것 같아 자책했다. 그래서 아이를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더 잘 키우고 싶은 마음, 느린 아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또래 수준으로 올리고 싶은 조급함이 이어졌다.
나아지고 싶어 시작한 공부는 불안을 낳았고, 불안은 또 다른 계획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자주 무너졌다. 아이들이 잠든 밤, 불 꺼진 거실에서 나는 종종 눈을 감았다.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내일도 반복될 거라는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그 두려움을 막연히 기록했다. 실패를 적었다.
그 기록들이 쌓이자 점차 형태를 갖춰 갔다. 하소연처럼 남긴 그 기록 속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어떤 날엔 아이와 웃으며 놀았고, 어떤 날엔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냈다. 가끔은 이유 없이 마음이 너그러웠다.
‘진짜로 내가 이랬다고?’
아이를 관찰하는 글 사이사이에 내 모습이 있었다. 아이의 기록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밖에서 떼쓰는 아이에게 차분하게 “안 돼.”라고 말하는 일, 같은 질문을 백 번 받아도 같은 톤으로 대답해 주는 일, 필요할 때만 단호하게 훈육하는 일. 이 모든 건 나의 체력과 정신력의 완벽한 협업 없이는 불가능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느 날엔 인자했고, 어느 날엔 주변 시선 따위 잊고 아이의 팔을 세게 끌었다.
모두 나였다.
아이의 기록 안에는 나의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아이를 위해 쓰던 기록은 결국 나의 사용설명서였다.
나는 작은 계획도 어긋나면 힘들어한다. 하루 일정이 밀리면 마음의 여유도 사라진다. 아이의 낮잠이 예정보다 늦어지면, 내 하루도 함께 흐트러진다.
그 작은 어긋남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문제라는 걸, 기록을 통해 조금씩 알아갔다.
이제는 안다. 계획이 틀어져도 괜찮다는 걸. 아이들은 그럼에도 엄마를 제일 사랑한다는 걸.
하지만 알아도 쉽게 되진 않는다. 여전히 계획이 어긋나면 불편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엔 쉽게 지친다. 그래도 조금씩, 전에 비해 내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세세히 지켜보는 것도 힘들고, 놓아주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독서 시간을 만들고, 글을 쓰고, 조용히 운동을 한다. 그렇게 아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쌓이듯, 나를 알아가는 시간도 함께 쌓여갔다. 내 아이만큼이나 나 자신도 소중하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아이를 잘 키우듯, 나도 잘 키우고 싶다. 나는 아주 멀리 돌아, 지치도록 몰아붙인 뒤에야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법을 천천히 배워가고 있다.
그 배움을 오늘도 기록한다. 언젠가 이 기록이 또 다른 나를 깨우길 바라며, 읽고 쓰는 시간 속에서 나를 다시 세워가려 한다.
다음의 기록은 책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조금 더 단단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가려는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