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환영받는, 나의 작은 꿈의 공간
그날따라 유난히 지친 오후였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허전한 날, 도서관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 영주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 한적한 동네에 ‘휴남동 서점’을 연다. 그곳에는 사장 영주를 비롯해 아르바이트생과 손님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모여든다. 평범한 서점에서 시작된 만남은 어느새 서로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어 준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포근해졌다. 서로를 배려하며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인물들의 온기가 페이지마다 스며 있었다. 그리고, '서점'이라는 배경은 나의 오랜 꿈을 불러왔다.
8년 전, 잡지 속 ‘제주도의 작은 서점’ 특집 기사에서였다. 주인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이런 공간을 갖고 싶다.’ 그날의 바람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구체적이고 단단한 형태로 자라났다.
내가 꿈꾸는 곳은 ‘OO 커피숍’. 이름은 지역명이 들어가지 않은,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면 좋겠다. 검색에도 잘 나오지 않고, 꼭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곳. 장소는 번화가나 큰 도로 옆이 아닌, 우연히는 찾아올 수 없는 조금은 외진 곳이면 좋겠다. 그리고 시골 동네 한쪽, 주차장이 넉넉한 곳이면 더할 나위 없다. 그곳에서 나는 ‘사장님’이라 불리고 싶다. 손님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되, 언제든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으로.
1층은 어르신들의 공간이다. 땀에 젖은 티셔츠 그대로 들어와도 괜찮은 곳. 창가에 앉아 얼음 동동 띄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 그곳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커피 향 사이로 세월의 이야기가 천천히 흘러간다.
2층은 아이들과 부모의 공간이다. 통창 너머로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보며, 부모는 잔소리 대신 웃음을 건네는 곳. 아이들의 웃음이 층을 가득 채우면, 그 소리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린다.
3층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곳. 혼자여도 괜찮고, 아무 말이 없어도 위로가 되는 그런 공기. 그곳엔 고요한 평화가 머문다.
나는, 어느 날은 2층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을 것이다. 또 어느 날은 3층 구석에 앉아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으로 긴 오후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먼 훗날,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즈음에는 1층의 창가 자리에 오래 머물게 될 나의 커피숍.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환영받는 존재가 되는 그런 곳.
사실 결혼 초, 잡지를 읽던 그때의 나는 내 취향으로 꾸민 작은 카페를 꿈꿨다. 좋아하는 책을 진열해 두고, 내가 만든 디저트를 내어주는 조용한 공간. 하지만 두 아이를 데리고 외식 한번 편히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꿈은 조금 달라졌다. 아이들이 환영받는 공간, 음식을 흘려도 괜찮고, 위험하지 않은 식기를 쓰며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는 곳을 그리고 싶어졌다.
전업주부로 살림과 육아에 치이며 숨 고를 틈조차 없던 시절에는, 오직 나 혼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 간절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커피 한 모금에 마음이 놓이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친정엄마와 동네 할머니들이 매일같이 모여 밥을 짓고, 수다를 떠는 어르신들의 쉼터도 필요했다. 그렇게 내 커피숍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모양을 바꿔왔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나의 인생도 층을 달리하며 조금씩 변해갔다. 어쩌면 그 커피숍의 세 층은 내 삶의 세대와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말했다. “여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 커피숍 차려주세요. 장사는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땅이랑 건물까지 같이 사줘야 해요.”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말엔 오래된 진심이 숨어 있었다.
손님이 많지 않아도 괜찮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떠밀려 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머물다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 내가 위로받고, 누군가를 위로해 줄 작은 공간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곳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수많은 거절과 거부 속에서도, 여전히 환영받는 곳. 생각만 해도 미소가 번지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따뜻한 나만의 커피숍처럼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꿈이 현실이 된다면, 창문 너머로 오후 햇살이 천천히 스며드는 순간, 잔잔한 음악과 커피 향 사이의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때 그 커피숍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에게도, 그 따뜻한 행복이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