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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 May 20. 2024

자몽, 달콤 쌉싸름한 기억

부제 : 이쁨아, 안녕 / 구분 : 외동아이 엄마로 산다는 것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있는지. 너무 절실한 나머지 어떤 부모들은 배아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첫 시험관 시술에서 의사는 내 뱃속에 두 개의 배아를 넣어 주었다. 사랑스러웠다. 한 개에 기쁨이, 다른 하나엔 이쁨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부르곤 했다. ‘아들이면 기쁨이, 딸이면 이쁨이라고 태명을 지어야겠다. 이왕이면 둘 다 착상에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의사는 둘 다 될 것 같지는 않다고 했지만 말이다.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배아들은 뱃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다가 하나는 자궁에 안착했고 나머지 하나는 실패했다. 나이 서른넷에 기쁨이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른바 독박 육아를 했고, 간혹 친정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삼 년의 시간이 폭풍처럼 흘러갔다.

둘째 임신을 목표로 시술을 결심했을 때 남편은 말했었다. “진작 시도하지 그랬느냐고”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2년의 모유 수유로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였고 그런 몸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시험관 시술을 받으며 두 돌배기를 키운다? 신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안정적인 엄마라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감정조차 제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가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과 남편에 대한 원망이 오락가락했다. 친정 가까운 쪽으로 이사 가자고 설득해 보기도 했었으며, 갈라서자는 말을 입에 담을 만큼 극한에 내몰려 있었다. 그런 내가 어떻게 시험관 시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시간이 흐르고 내 강한 설득 끝에 남편의 육아 자세가 조금 바뀌었다. 아빠에게 가지도 않던 아이와 친밀한 관계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건 결혼기념일에 내 걸은 조건 ‘하루 한 시간 아이와 시간 보내기’를 남편이 실천해 준 덕분이었다. 목욕을 시키든, 놀아주든 상관없이 아이와 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 여겼다. 아이가 아빠에게 마음을 여는 시기에 내게도 둘째에 대한 갈망이 슬슬 생겨났다. 사실 원래부터 딸을 원했었고, 외동아들의 부모이자 친구, 형제가 되어주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가슴 한편이 쓸쓸했었다. 그렇게 둘째 시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몇 번의 시도 중 가장 후회되고 기억에 남은, 실제 이쁨이가 내게로 와준 것만 같았던 시간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달콤하고 행복했던, 그러나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쌉싸름한, 그래서 마치 자몽 같은 시간이.




배아 이식을 받았을 때, 이번에는 잘 될 것 같다는 무척 좋은 예감이 들었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가족여행 일정을 취소하지 않고 강행했다. 이식 후 사흘 만에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살던 사택이 공사 중이라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럴 겸 남편이 여행이나 하자고 한 것이었다.

경주와 원주, 속초에 걸친 6박 7일 강원도 여행이었다. 공사가 끝나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었다. 2박 3일은 우리 가족끼리, 4일째 되는 날부터 부모님과 같이 보내기로 일정을 잡았었다. 3일째 되던 날은 하늘이 흐렸다. 일정은 평창올림픽 스키점프전망대-삼양 양떼목장-원주 키즈카페-홍천 비발디파크, 한마디로 강행군이었다. 양떼목장에서 돌아오는 셔틀에 탔을 무렵 바람이 거세지고 비가 쏟아졌다. 고요한 가운데 전화가 왔다. 경찰서였다. 사실 여행 가기 몇 주 전 하루에 2회의 자동차 사고를 겪었었다. 모두 주차장에서 일어났고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중 두 번째로 접촉했던 트럭 차주에게서 뺑소니 신고가 들어왔으므로 무척 놀랐다. 그 당시 초보운전이었다. 하루에 두 번째 사고를 일으킨 데다가, 육안만으로는 긁힌 자국이 보이지 않아서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었다. 통화 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키즈카페 안으로 들어가 아이와 놀아주는데, 엎드리지 말 걸 그랬다.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하며 구토할 것 같은 감각에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속으로 빌었다. 제발 배아가 무사하기를…. 이식 후 급격히 상승한 호르몬 수치 때문이었는지 내면의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동의보감에 일컫는 토사곽란(吐瀉癨亂)-오늘날의 급성위장염-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위아래로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낸 뒤에야 낫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그런데 내 경우 구역질만 날 뿐 토할 수조차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이쁨아, 엄마가 미안해. 제발 견뎌줘. 제발….’ 나는 배아에 수없이 말을 걸고 또 걸었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변기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내게 여행을 관두고 돌아가자고 했다. 다음 날은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고, 이 여행을 괴로운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때 돌아왔어야 했는데 말이다.


부모님은 이런 내게 따스한 위로였다. 엄마는 아기씨를 품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하며, 희망을 심어주셨다. 조식 메뉴 중 특히 과일을 여느 때와 달리 많이 먹는 나를 바라보며, “너를 가졌을 때 그렇게 과일이 당기더라. 이번엔 틀림없나 보다.” 하셨다. 나는 씹고 있던 과일만큼이나 달금한 기분에 취해 상상의 나래를 폈었다. 맑고 동그란 눈동자,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을 그리며 얼마나 행복했던지. 계속되는 구역감과 오심조차 입덧이라 여기며 이번엔 반드시 임신일 거라고, 스스로 세뇌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몇 주 뒤 입덧 증세가 그쳤고, 배아는 화학적 유산되고 말았다. 몇 달을 눈물로 지새며 생각했었다. 착상될 중요한 시기에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질러서, 부모 될 자격이 없기에 결국 이렇게 되었는가. 종일 편안히 누워만 있어도 될까 말까인데 집을 떠나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생했으니 잘 될 리가 없지, 자조하면서 죄책감에 짓눌려 지냈었다.

이렇듯 둘째 임신은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으나 잠시나마 달콤할 수 있었던, 그러면서도 쓰라린 회한이 추억으로 남았던 시절이기에 가끔 자몽을 베어 물듯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깨물었을 때 터져 나오는 달콤한 과즙 끝엔 쓰고 비린 피 맛이 입안을 감돌지만, 그 시간만큼은 이쁨이가 내 뱃속에서 선명하게 유영하고 있었으므로.

실제 이쁨이가 내게로 와준 것만 같았던 시간이 있었다.  / 가끔 자몽을 베어 물듯 그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덧.

기록 순이로서 거의 모든 여행의 기록을 남겼던 나이지만, 유독 21년 강원도 여행의 기억만큼은 날아가 버린 듯 선명하지 않다. 괴로운 기억일수록 사람의 뇌는 잊으려고 애를 쓴다는데, 그런 연유로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작년 9월에 쓰기 시작해서 중간에 쓰기를 포기했었다가, 겨우 끝마무리를 지은 것은 올해 5월이니 말이다.
흔히 자몽하면 달콤쌉싸름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나는 이전 글 ‘바람과 같은 인연이라도’에서 첫사랑에 대해 이미 써 버렸으므로, 내게 달콤했지만 쓰라린, 쓰리고 아픈 기억을 꺼내어 쓰게 되었다. 이전에는 회상하는 것 자체가 그저 슬프고 아프기만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상상을 했던 것 자체는 참 달콤했었기에, 약간의 씁쓸한 미소로 그 일을 추억해 본다. 이제는 정말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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